본 연재의 첫회에 「덕주할아버지와 꽃순이」의 출판본에 대하여 소개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책을 감수하면서 각주에 기록하였으나 편집 과정에서 발행처의 사정에 의해 빠져버린 내용들을 소개드립니다.
책의 첫 부분입니다. (p.2)
(p.2) 나의 이름은 꽃순이로 나이는 여덟 살입니다.
나는 할머니, 북술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북술이는 우리 집 삽살개인데 나하고 얼마나 친한지 항상 붙어 다닌답니다. 할머니께서 엄마는 내가 아기일 때 하늘나라로 가셨고, 아빠는 몇 년 전에 만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다고 이야기합니다.
할머니와 손녀 꽃순이는 1930년대에 제피내의 건넌마을 화장장 아래에서 주막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장례를 마치고 화장을 하는 날이면 주박에는 제법 많은 손님들로 북적대곤 하였습니다.
■ 1955년 3월 조천리(제피내) 주변도 : 위 책 뒷표지의 지도(p.20)
▼ 진해시 승격(1955년 9월 1일) 직전인 1955년 3월 필자의 부친(朴德守. 당시 만 23세)이 제작한 밀양 박씨 문중의 분묘배치도로 조천리와 경화동 주변의 지형이 잘 나타나 있다.
제피내 : 일제강점기에 경화동의 신시가지 북서편 조선인 마을인 조천리(造川里)를 대부분 이렇게 호칭하였다. 이하 각주는 밀양박씨조천문중의 구전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각주 편집 : 박건춘(朴建春)
■ 화장장 : 사진출처: 진해구 중앙동사무소. 진해화장장은 조천리 건넌마을 북쪽에 1910년대에 설치되어 1990년대까지 존속하였으나 이후 장천동 산 1번지로 이전하여 운영하고 있다. 보통 경화화장장으로 불렸고 여름철에는 해병대의 담력 증강을 위한 훈련장소로도 이용되었다. 2005년 이후 경화포스코더샾아파트가 입주하여 있다.
(p.3) 덕주 할아버지는 한 달에 한두 번 저의 집에 오셔서 할머니가 팔고 남은 탁주 찌개미를 얻어가곤 하였습니다.
■ 김덕주 : 김덕주(金德柱)는 진해 경화동 조천리의 선산(善山) 김씨(金氏) 30대손으로 전하며 덕조로도 호칭하였다.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드물게 풍덕개장이나 경화장에도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의 각종 예언들은 조천리의 김덕주 지인들을 통해 주로 장시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행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를 이인(異人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 또는 기인(奇人 성격이나 말, 행동 따위가 보통 사람과 달리 유별난 사람)으로 불렀다.■ 찌개미 : ‘액체가 다 빠진 뒤에 바닥에 남은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 술찌개미, 줄여서 술찌끼라고도 한다.
(p.3) “그럼 덕주 할배는 어디에 사는데?”
“덕주 할배는 비람모가지 뒤편의 큰 바위집에서 살고 있단다.”
■ 비람모가지 : 진해의 땅이름 이야기에서는 비림목, 또는 비림모가지로 호칭하나 밀양박씨 족보 및 가첩의 기록에 따라 비암목(飛巖目)이 변음된 비람목, 비람모가지로 정리하였다.
■ 큰 바위집 : 가장 높은 꼭대기에 있는 큰바위 옆에 직접 운반해 온 바위들을 붙여서 지은 바위집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조천리 주민들은 이곳을 덕주암, 덕주바위 또는 덕주방구로 불렀다. 덕주가 떠난 후 집은 무너지고 바위들만 남게 되었는데 지금은 덕주봉으로 통칭하고 있다.
(p.4) “순이 할매, 잘 가져가요. 좀 있다가 설거지하소.”
덕주 할아버지는 제피내의 박씨 집에 잠시 들른 다음에 경빈등을 지나 비람모가지로 올라가는데 그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북술이는 덕주 할아버지를 쫓아가다 그만 서버렸습니다.
■ 박씨 집 : 평소 가까이 지냈던 경화동 1256번지, 1459번지 및 1464번지의 밀양 박씨 세 집에 종종 들러 식량과 생필품을 얻어 덕주암으로 올라갔다고 구전하고 있다.
■ 경빈등 : 강변등(江邊嶝)에서 변음된 지명이다. 경빈등(慶濱嶝)은 경화대동다숲아파트 북쪽의 등성으로 2000년 이전에는 주로 논농사를 하였으나 이후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경비등(慶飛嶝), 갱비등(更飛嶝)으로 불렀다.
■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 김덕주는 초인적인 걸음걸이로 걸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축지법을 쓴다고 이야기하였다. 아주 빠른 걸음으로 김덕주가 알고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이용해 마을에서 덕주봉에 도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언젠가는 친척들과 같이 부산에 갈 일이 있어서 경화역에서 기차를 탈 때 김덕주는 굳이 걸어가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서로 헤어졌는데, 친척들이 부산역에 도착해 보니 김덕주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이야기가 선산 김씨 집안에서 구전되고 있다.
(pp.8-9) 집으로 돌아오자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할아버지가 말했다는 이야기들을 오늘도 들려주셨습니다.
‘흰 다리가 오면 나라가 망한다. 한일거리에 큰 도시가 생길 것이다. 장시(5일장)가 옮겨올 것이다. 웅동에서 뱀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 올 것이다. 벌통 같은 집에 살게 되면 세상 다 된 줄 알아라. 창원에서 큰물이 넘어올 것이다. ’
■ 1. 경화장시의 모습 → 출처 : 박건춘. 경화교육백년사 p.12. 경화초등학교. 풍호동의 풍덕개장이 1914년 경화동으로 옮겨와 매월 3일과 8일, 월 6회 개장하였다.
사진 출처 : 1910년대 중후반 진해학교조합 발행 「진해대시가건설현황」. 1914년 경화장시가 옮겨온 이후의 사진이다.
2. 출처 : 진해의 땅이름 이야기pp.150-151. 황정덕. 2000. 군항 설치를 위한 측량을 하기 위하여 다리에 흰 행건을 두르고 진해에 최초로 들어온 일본의 해군육전대, 들판이었던 한일거리가 도시계획으로 경화동이라는 격자형 도시로 된 것, 풍덕개의 장시가 경화동으로 옮겨온 것, 웅동에서 서진해까지 송수관이 부설된 것, 아파트 건설로 인심이 각박해질 것을 의미하며 예언이 적중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본 내용은 경화동의 선산 김씨 김재석(金在錫. 현 84세)의 구술에 의한 것임을 출처에서 밝히고 있다. 이 중 마지막의 벌통같은 집은 밀양 박씨 집안에서는 「닭장같은 집」으로 전하여 오고 있는데 아파트의 구조로 보았을 때 벌통보다 더 적절한 표현으로 보고 있다.
3. 진해선(진해-창원간 철도) 개통을 위한 경화굴의 가설로 창원 성주사에서 서진해까지 송수관이 부설된 것을 뜻한다. 부친 朴德守의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
■ 경화동 덕주동산의 김덕주 도안
붙임파일은 이상의 내용들을 추가하여 PDF파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본 파일을 참고하며 2013년 10월의 출판본을 보시면 도인 김덕주의 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봅니다.
다음 회에서는 경화동의 덕주동산에 대하여 소개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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