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주의 예언은 최초 다섯 가지만 책에서 소개가 되었습니다만 필자가 전 회에서 밝힌 1종을 더해 모두 여섯 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여기에 1종을 추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채 넘긴 것으로 그의 식생활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김덕주는 장차 난리가 나면 양식으로 하겠다면서 비지나 엿 찌꺼기를 모았고, 평소에는 술찌개미나 솔잎을 주식으로 하였다.」
출처 : 진해의 땅이름 이야기(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2000) p.150
당시는 지금처럼 언론이나 사상의 자유가 없던 때이므로 김덕주도 말을 최대한 아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난리는 중일전쟁에서 촉발된 태평양전쟁을, 식량(양식) 부족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식량을 비롯한 부족한 물자와 군인과 광부, 위안부와 같은 인력의 강제 징발을 뜻합니다.
따라서 김덕주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래와 같았을 것입니다.
「장차 큰 전쟁이 일어나고 물자와 인력의 강제 징발이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 hyunw49/보국대(報國隊)를 아시나요?(2009.3.5)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감히 입에 담을 수는 없었으므로 난리(전쟁)가 날 것에 대비하여 양식으로 술찌개미와 같은 것을 모은다고 돌려서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최소로 함축하여 김덕주가 지인에게 전할 수 있는 내용으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장차 난리가 나면 극심한 양식 부족이 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진행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을 침략한 이후 1941년에 미국은 일본 제국에 경제 제재와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반발한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참전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태평양과 아시아의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영어: Pacific War, 일본어: 太平洋戦争 (たいへいようせんそう))이라 한다. 당시의 일본정부는 대동아전쟁(일본어: 大東亜戦争 (だいとうあせんそう))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중일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전쟁을 위한 지하자원 및 원료의 부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힌다. 게다가 미국이 중일 전쟁을 치르던 일본 정부에게 중국 등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대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나라의 운명을 걸고 일으킨 전쟁이기에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미일 통상 조약은 파기되어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으며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철광 등 지하자원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철·석유·고무 등 물자가 부족해졌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반도나 만주 등에서 나오는 지하자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한다.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침공이었다. 석유·고무·철광 등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이다.
인도차이나 점령이 성공한 후에도 일본은 더욱 많은 곳을 침공하길 원했고, 인도차이나 점령 이후 일본 제국은 동남아시아 지역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941년 군인 출신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수상으로 한 군부 내각이 들어섰다. 이들은 군부의 여러 인사 중에서도 매우 강경파로서 미국과 전쟁도 불사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만 4년 8개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출처 : 위키백과/태평양전쟁
이상의 글을 살펴 보면 일본이 물자 부족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물자 징발을 시작한 시기는 미일통상조약 파기(1939년 12월) 직후인 1940년부터로 볼 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 http://modernhistory.hanyang.ac.kr/lifestyle/h2-1/2-16.htm/# 2-16) 전시 미곡공출 : 일장기 아래 미곡공출{한국백년-2}
김덕주는 일제에 의한 전쟁 발발로 이러한 물자 징발이 있을 것을 내다보고 마을에서 양식을 얻어오는 대신 비지나 엿 찌꺼기, 술찌개미 등을 얻어서 비축하며 양식 부족에 미리 대비를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술찌개미는 알콜이 있어서 쉽게 상하지 않으므로 오랜 기간동안 보관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중일전쟁에 이은 태평양전쟁의 발생시기를 고려하면 김덕주의 이 예언은 1930년 전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다음 회에는 김덕주의 마지막 예언인 닭장r과 관련된 이야기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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