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N 창원교통방송에서 광복 7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진해 관련 인터뷰를 소개드립니다.
방송주제와 송출일자별 소재는 아래와 같습니다.
◈ 광복 7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군항과 벚꽃에 가려진 아픈 역사
◈ 인터뷰 일시, 장소 : 2015년 8월 6일(목) AM 10시 30분, 도천초등학교 교장실
◈ 방송예정일시 : 8월 15일 8시 30분-9시 제1부 빼앗긴 자의 도시 진해
8월 16일 8시 30분-9시 제2부 쫓겨난 자의 도시 경화동
1. 일제 강점기, 일제가 진해에 군항을 건설하면서 중원광장을 중심으로 일본인만을 위한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원래 그 지역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외곽으로 쫓겨났다. 쫓겨난 과정과 이유는?
일제가 진해를 군항으로 이용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군대를 주둔시킨 것은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8월부터입니다. 1910년 4월 해군임시건축지부를 현동에 설치하고 12월에 군항설계를 끝내면서 10년간의 군항설치공사를 시작하였다. 동양 유일의 양항인 진해에 그들만의 계획도시를 건설하려 하였기 때문에 불필요한 조선인들은 강제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이 위생상 더럽다고 붙인 이유는 사실상 조선인들을 쫓아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하겠다. |
2. 구체적으로 토지를 강탈당한 지역이 어디인가?
서부지역의 비봉리에서 현동, 도만, 도천, 중평, 안곡, 여명, 좌천, 신좌천리 등 9개 마을과 동부지역 2개 마을 등 11개 마을 주민들이 헐값에 토지를 강탈 당하고 쫓겨났다. |
3. 하루 아침에 터전을 잃고 쫓겨난 조선인들이 쫓겨난 곳이 어디인가?
처음에는 5km 정도 떨어진 덕산리를 계획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가지와 덕산리의 중간 지점이었던 한일거리로 변경하였다. 한일거리는 대부분이 구릉과 개펄로 되어 있어서 부지 확보가 쉬웠던 점, 이동거리가 짧아 군항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을 가까이에 둘 수 있었던 점, 마을 가운데와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어서 거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생활용수가 풍부하였던 점들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군부대와 경찰서 등이 가까이에 있어서 조선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가 가능했던 점이 이주지로 선정된 가장 큰 이유로 볼 수 있다.
4. 지금의 경화동, 당시 한일거리로 쫓겨난 조선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던데. 구체적인 사건을 소개하면
먼저 도만리에 상륙한 일본해군 육전대의 측량기사들은 1905년 12월 건장한 청년이었던 우찬옥을 비롯한 마을주민들이 힘을 합쳐 쫓아낼 수 있었으나, 1906년 9-10월 경 다시 상륙한 측량기사들을 밀어내다 끌려간 우찬옥은 일본헌병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에 풀려날 수 있었는데 이 사건이 진해지역근대 항일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07년 봄에 일본 이사청 관리들이 현동과 덕산리에서 군항 경역 편입 지주들에게 땅값을 지불하려 하였다. 일본인들이 땅값의 반만 지불한다는 제보를 받은 우찬옥을 비롯한 동지들이 제값받기를 위하여 땅값수령거부운동을 벌이다 일본 헌병에 끌려간 사건이 있었다. |
5. 경화동으로 격리 이주된 조선인들의 당시 생활은 어땠나? 중원광장을 중심으로 조성된 신도시에 살던 일본인들의 생활과 비교한다면?
경화동의 신시가지 조성은 1914년에 완료되었는데 강제 이주된 조선인들에게는 45평의 주택지만 제공이 되었다. 재산이 많았거나 신학문을 공부하였던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일본인 지주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수확량의 4, 5할을 소작료로 내었기 때문에 지극히 궁핍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반면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진해로 이주한 일본인들에게는 직장 알선을 비롯한 많은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6. 일본인과 조선인의 거주지를 이렇게 철저하게 분리한 것을 어떻게 보나?
일본인들은 조선에 최초로 조성한 계획도시였던 서진해지역에 그들만의 소일본을 건설하려 하였다. 조선인들을 피지배민족으로 생각했던 그들의 뿌리깊은 민족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소개드리겠다. 지금의 학사보고에 해당하는 1923년도 진해공립공업보습학교의 학교일람에『x印다朝鮮人토스』라는 기록이 나타납니다.『x로 쓴 것은 다 조선인이니 학교 밖으로 쫓아내라』는 뜻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편견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라 하겠다.
7. 진해에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근대문화유산이 남아있는 등 아픈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걸 현재 우리 세대가 어떻게 활용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기억하기 싫은 망국의 역사도 우리 역사의 일부이다. 우리 국민들이 과거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교훈으로 삼으려면 진해의 근대문화유산들을 체계적으로 관리, 보존함으로써 관광자원의 차원을 넘어 애국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
청색 글씨는 편집되어 송출되지 못한 부분입니다.
이달 중 계간진해가 발행되면 진해심상고등소학교에 부설하였던 진해공립공업보습학교에 대하여 소개드리겠습니다.
'진해실록 > - 보도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해학교조합 설립 학교 사진전 (0) | 2016.01.15 |
---|---|
진해공립공업보습학교의 탐색 (0) | 2015.12.14 |
도천초등학교 새 백년의 좌표 (0) | 2015.10.01 |
일제강점기 진해의 학교 (0) | 2015.09.30 |
우찬옥과 문석윤 (0) | 2015.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