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실록/- 보도자료

도천초등학교 새 백년의 좌표

진해인 2015. 10. 1. 07:00

2015년 6월 15일 출간한 계간진해 여름호(제89호) pp.142-151에 실린 원고입니다.

 


도천초등학교 새 백년의 좌표

도천초등학교장 박건춘

 

도천초등학교는 1012년 일본인 학교로 개교한 후 103년이 지났다. 도천초등학교사는 일제강점기에 진해학교조합에서 학교를 설립한 구제학교사(舊制學校史)와 광복 후의 도천초등학교사로 대별할 수 있다.

 

개교 입선정(1912.11.16.) 차화정(1913.4.1.) 신축교사(1913.12.7.)

 

 

. 진해학교조합(鎭海學校組合)

1900년대 초에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들의 자녀교육은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설립한 지역학교조합에서 담당하였다. 학교조합은 학교조합관리자와 서기, 평의원과 회원들로 구성된다. 조합의 경비는 학교기본재산과 회원들의 조합비, 학생들의 수업료, 조선총독부의 교부금 등으로 충당하였고 업무 처리를 위하여 사무실을 별도로 두었다.

 

1. 진해학교조합의 설립 과정

일본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부딪치게 된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가 자녀교육에 관한 문제였다. 1908년 이후 진해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진해에 자녀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제등만(齊藤灣 : 현 중평만)에서 증기선을 타고 마산의 마산심상고등소학교에 통학을 하였다. 그러다 1910년 이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진해로 들어온 이주인들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학교 설립을 서두르게 되었다.

19111011일에 학교 설립를 위한 학부모 및 지역민 대표자들이 발기인 모임을 갖고 학교조합과 학교 창립을 결의하였다. 1020일에 정수구십랑(井手九十郞)을 대표자로 하고 서기 2, 조합임시평의원 12명으로 현동학교조합(縣洞學校組合)을 먼저 설립하고 103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조선총독부고시 제329)

1216일에는 2년 임기의 제1회 현동학교조합평의원회 조직하여 초대교장에 재만직일(財萬直一), 조합주임서기에는 약림금태랑(若林金太郞)을 임명하여 개교에 따른 제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1218일에는 선거에 의해 조합의원 12명을 선출을 완료하였다.

임시해군건축지부장 해군 소장 상천덕미(上川德彌) 사령관이 1911126일 해군성(海軍省)으로부터 학교기본재산에 대한 가인가를 받고 상경하여 1218일 최종 인가를 득함으로써 학교기본재산을 확정하였다. (연혁지) 해군성(海軍省)의 산림원야(山林原野) 1,231,560, 50,0308() 5(), () 9,4054, 택지 179,8164홉으로 실제 합계는 1,475,900(합계에 후 임대한 학교림 산입)이며, 토지는 향후 30년간 임대하기로 하였다. 진해면 신시가 제등만 북방 남십(南辻. 현 남원광장), 남방지 행암만 조일통(朝日通, 日出町通) 부근 일대 및 당시 정거장 북방 일대의 땅인데 315일부터 331일까지 일반민을 대상으로 재임대를 하니 금액이 13천 백여원의 거액이었다. (향토지초안 p.23)

191238일 현동학교조합은 전년도인 1911111일자로 소급하여 진해학교조합으로 명칭 변경 인가를 받음으로써 학교조합의 설립을 완료하였다.(조선총독부고시 제68)

 

구 해군임시건축지부 가교사(지도 )

 

2. 진해학교조합의 학교 설립

. 현동심상고등소학교(縣洞尋常高等小學校)1912110일 개교하였으며 일본인 자녀들만 취학이 허용되었다. 현 도천초등학교이다.

. 진해공립공업보습학교(鎭海公立工業補習學校)는 진해공립심상고등소학교의 부설학교였다. 191831일 진해공립간이전수학교로 개교하였고, 192242일 진해공립공업보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기본 2년제에 연구과 1년을 추가하여 운영하였고, 일부 조선인 자녀의 입학이 허용되었다.

. 경화공립심상소학교(慶和公立尋常小學校)는 도불산(道佛山) 이동(以東)의 일본인 자녀교육을 위해 1920412학급으로 개교하였다. 193841일 경화공립심상고등소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고등과 1학급을 추가 개설하였다. 현 진해중앙초등학교이다.

. 진해공립고등여학교(鎭海公立高等女學校)는 심상고등소학교의 고등과를 졸업한 여생도를 대상으로 1923423일 개교하였는데, 고등보통학교와 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일부 조선인 여생도의 입학을 허용하였다. 현 진해여자고등학교이다.

. 진해제삼공립국민학교(鎭海第三公立國民學校)는 북가(北街. 현 여좌동)의 일본인 자녀교육을 위하여 설립한 학교로 194441일 개교하였다. 현 대야초등학교이다. 동일자에 당시의 진해제삼공립국민학교는 진해경화공립국민학교, 진해제사공립국민학교는 진해덕산공립국민학교로 모두 교명을 강탈 당하면서 진해의 대표 이름이 아닌 동리 이름으로 격하되었다.

. 진해공립중학교(鎭海公立中學校)는 심상고등소학교의 고등과를 졸업한 생도를 대상으로 194447일 개교(학교장 발령일 기준)하였다. 고등보통학교와 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조선인들의 입학도 일부 허용하였다. 현 진해고등학교이다.

 

 

. 구제학교사(舊制學校史)

일제강점기에는 설립 주체에 따라 조합학교기와 관제학교기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진해심상고등소학교 또는 진해소학교로 불렀다.

1. 현동심상고등소학교-진해심상고등소학교

19111011일 현동학교조합의 총회 후 현동심상고등소학교의 창립을 결의하고, 1020일 학교 설립을 인가하였으며, 1216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다.

191214일 임시교사로 사용할 구 해군임시건축지부 부지(海軍建築地部跡)에 대한 임대(貸下) 인가를 받고, 110일 마산심상고등소학교 전입생 126, 신입생 40명 등 166명이 교직원 3명과 함께 개교식을 하였다. 115일 구 해군임시건축지부 부지의 차입을 완료하면서 이곳에서 3학급으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11일 창원군 웅중면과 웅서면이 진해면으로 바뀜에 따라 119일 교명을 진해심상고등소학교로 개칭하였고, 325일 제1회 졸업수업증서수여식을 거행하였다. (졸업생 남 18, 8, 수업생 남 114, 106, 220)

 

 

 

2. 진해공립심상고등소학교(鎭海公立尋常高等小學校)

191241일 관제 개편에 따라 교명을 진해공립심상고등소학교로 변경하였다.

1116일 입선정(入舩町. 山取町 산취정 ②)에 가교사를 준공하고 분교장(分敎場) 설치하여 심상과 1, 2, 3, 4학년 각 1학급을 수용하였다.

1913416일 차화정[此花町. 후 국천정(菊川町)으로 개칭 ③]에 분교장 설치하여 심상과 1, 2학년 4학급 수용하면서 입선정의 분교장을 폐지하였다.

1128일 교기를 제정하였고, 123일 현재 위치에 신축교사를 준공(7일 준공식 ④)하여 이전하였으며, 19171022일 교가(校歌)를 제정하였다.

1930310일 육군기념일에 진해만요새사령부에서 활동사진 관람 중 오후 240분에 발생한 대화재(椿事)107(본교 아동 57, 경화소학교 24, 진해고등여학교 1)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들은 장례를 치른 후 북가(北街)의 덕환관음사(德丸觀音寺)에 안치하였다.

1934210일 신축강당 준공식을 가졌다.

3. 193841일 조선교육령 개정에 따라 교명을 진해제일공립심상고등소학교(鎭海第一公立尋常高等小學校)로 변경하였다.

4. 194141일 국민학교 제도 실시에 따라 교명을 진해제일공립국민학교(鎭海第一公立國民學校)로 변경하였다. 1942528일 풀장(수영장)을 준공하였다.

개교 이후 초등과는 총 342,903, 고등과는 총 331,929명 등 4,2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 도천초등학교사(道泉初等學校史)

도천초등학교사는 진해학교조합으로부터 학교를 접수하고 재개교한 이후 지금까지 약 70년간으로 구교명사용기와 도천교명사용기로 나눌 수 있는데 지금은 도천초등학교로 통칭하고 있다.

 

1. 진해제일공립국민학교(鎭海第一公立國民學校)

1945815일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과 그 자녀들은 대부분 귀국을 한 가운데, 미군정청의 학교재개령에 따라 928일 진해제일공립국민학교의 초대교장(겸임)으로 하창수가 부임하였다.

1030일 교장 하창수와 진해경화공립초등학교 훈도 주기영이 구 진해제이공립국민학교장(현 진해중앙초등학교) 원등문남(遠藤文男)과 진해학교조합 서기 서촌총차랑(西村總次郞)으로부터 본교 교지, 교사, 비품 등을 접수하였다. 다음날인 1031일 진해경화국민학교에서 태백산(도불산) 이서(以西) 지역의 아동 462명을 훈도 주기영, 손영한, 이무환, 김종두 등 5명이 본교로 인솔하였고, 각 단체와 학부형, 진해읍민들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진해제일공립국민학교의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8학급 편성)

 

1열 좌9(주빈 경화교 김영필 교장-본교 제2대 겸임교장), 좌10(본교명 초대, 총 3대 주기영 교장)

 

 

2. 진해도천공립국민학교(鎭海道泉公立國民學校)

1946228일 제2대 김영필 교장(겸임)이 부임하여 노력한 결과 531일 진해도천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3대 주기영 교장이 본교 전임으로 부임하였다. 629일에 제1회 졸업증서수여식을 거행하여 111(73, 38)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03일에 첫 교기를 제정(이후 3회 개정)하였다.

1950625일 발발한 전쟁으로 한 때 전 교사를 모두 비우고 해군운동장(현 진해공설운동장)에 설치한 가교사에서 야외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3. 진해도천국민학교(鎭海道泉國民學校)

1951년 716년제 공립중학교가 각 3년제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된 이후의 기간으로 앞선 교육시설과 학부모의 적극적인 협조, 해군측의 지원 등으로 본교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시기였다. 각종 학예행사와 체육대회 등에서 항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문교부와 도교육청의 연구학교도 계속해서 맡으면서 경상남도 1번지 학교라는 애칭도 얻었던 시기였다.

전쟁 피난으로 유입된 아동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19537월에 교사 2동을 신축하였고, 195512월에는 AFAK(국제연합한국재건단대한군사원조단)의 지원으로 교사 3개동 14교실을 준공하였다.

195441일에는 3년제의 진해도천공민학교(鎭海道泉公民學校)를 부설하여 취학시기를 놓친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였고, 19642월 폐교할 때까지 총 813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56년부터 학교시설 개선에 착수하여 기상대, 양어지, 온실, 어린이우체국, 방송실과 각종 놀이 및 운동기구들을 조성 및 확충하였고, 1960년대에는 조형실, 반공관, 향토관을 조성하였다.

1961331일 중평분교장을 개교하고 196231일 남산국민학교로 승격, 분리함으로써 급증하는 아동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노후교사를 철거하고 1968년에는 후관교사 324교실 신축하였고, 1983년에는 남쪽 본관교사를 준공하였다. 도시형급식학교로 지정되어 희망자에 한해 학교급식도 시작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는 동물원, 위인 동상 제막, 국민정신교육실, 역사실, 과학실, 컴퓨터실, 급식소, 해양탐구관 등을 조성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미진학 청소년들을 위하여 사회단체에서 개설한 서부재건학교(중학교 과정)와 서부새마을청소년학교(고등학교 과정)에 교실을 무상대여하였다.

198716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여자탁구에서 우승하며 본 대회의 첫 금메달을 가져왔다. 

 

 

 

4. 도천초등학교(道泉初等學校)

199631일 도천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7년 개설한 도천어린이방을 200031일 본교병설유치원으로 승격, 개원하였다. 200736회 전국소년체육대회(포항) 유도 65kg이하급에서 두 번째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200824일에는 인조잔디운동장을 개장하였으며, 20152월까지 총 7019,18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도천(道泉)’의 철학적 의미는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채운 후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다. 10월에는 학교 100년사를 정리한 도천초등학교실록을 발행하며 새로운 100년의 좌표로 삼고자 한다.

 


도천초등학교실록은 본교 개교 제70주년기념으로 총동창체육대회일인 10월 18일 학교에서 주최하여 발행할 예정이었습니다.

총동창회의 동창회 관련자료의 수집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다시 개교기념일(10월 31일. 토요일로 휴무일) 하루 전날인 30일(금)로 늦추었습니다.

그런데도 업무 추진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아서 발행을 무기연기하였습니다.

빠르면 12월, 더 늦으면 내년 2월이나 되어야 발행이 될 것으로 예상해 봅니다.

앞으로의 발간 행사는 학교가 아닌 총동창회에 주최로 넘겨서 진행할 계획입니다.

학교에서 명분이 없는 행사를 치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회에는 지난 8월 15일과 16일 광복 70주년 특집다큐멘터리로 창원교통방송에서 송출한 인터뷰 내용을 안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