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진해의 전설
9. 아들은 효자, 며느리는 효부
"저 범 잡아라!"
장정들이 저마다 흉기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범을 잡으러가니 범은 당황하여 달아날 방향을 산으로 잡지 못하고 제포 쪽으로 잡았다.
곰메(能山)에 살던 범 한 마리가 굶주렸던지 어느 날 서중 마을까지 내려 와 먹이를 찾았다.
들에서 일을 하다가 그 범을 본 장정들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가니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도 다같이 나섰다.
제포쪽으로 내닫던 범은 망덕 마을 근처 논에서 무심히 일을 하고 있던 서지순의 부친을 물고 따라오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사람 살려라"
다른 논에서 일을 하고 있던 서지순이 이 비명 소리를 듣고 그 쪽을 보니 범이 부친에게 덤비고 있었다. 그는 낫을 들고 범에게로 다가갔다. 범을 따라온 마을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그는 낫을 범에게 겨누고 내리치려 했다. 낫을 든 지순을 본 범은 부친을 놓고 이번에는 지순에게로 덤볐다. 지순과 범의 격투가 벌어졌다. 용맹한 지순은 끈질긴 격투 끝에 마침내 범을 죽이고 말았다.
지순의 용감한 격투로 범을 죽여 마을 사람들은 호난을 면하였으나 망덕 마을과 지순의 집안에는 발안한 일이 생겼다. 부친의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고, 밤이면 암범 한 마리가 망덕리 뒷독메에 내려 와서 으르렁거리며 위협을 하는 것이었다. 밤마다 들리는 암범의 포효로 온 마을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지순의 집에서는 그 위에 범에게 물린 부친의 상처는 덧나서 안절부절이었다.
"보이소(여보) 무슨 좋은 수가 없는 기요(없습니까)?"
지순의 아내(경주 이씨)는 잠자리에 들면서 근심스럽게 남편에게 물었다.
"무슨 뾰족한 꾀도 안 나고 그렇다고 점쟁이를 찾아갈 수도 없고...... "지순은 한숨만 길게 쉬었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아내는 "보이소, 제가 이래(이렇게) 해 볼까요. 저어...... 독메에 호단을 지어 치성을 드리고, 아버님 상처의 고름을 빨아내고......"
아내의 말을 듣고 누웠던 지순이 벌떡 일어나며
"보소(여보), 호단을 짓는 기이사(것이야) 어렵겠소만 고름을 우째(어떻게) 입으로 빨아낸단 말이요."
"가만히 계시이소(계십시오). 제가 해 볼끼잉께(볼터이니)."
날이 새자*지순은 호단을 지었고, 아내는 치성을 드렸다. 그리고 시아버지의 상처에서 약을 떼어내고 깨끗이 닦은 뒤에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고 다시 약을 발랐다. 그런 며느리의 정성스러운 치성과 간병은 하루도 쉬는 날 없이 계속되었다. 하루가 가고, 열흘이 가고, 한달이 가고, 한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삼년이 지나자 그 효과는 나타났다. 상처는 아물고 범도 나타나지 않았다. 철종 때에 와서 이러한 사연이 상주되어 아들 지순은 '호조참판'으로 그의 아내는 '정부인'으로 추서되고 '쌍효각'을 지어 그 효심을 가리게 하였다. (교남지에서)
10. 아천자의 비련
조선시대 왜국에 제포를 개항하였을 때의 일이다.
대마도주의 사신을 따라 제포를 내왕하던한 역관과 웅천의 기생 '아천자'(阿天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역관이 대마도로 돌아가고 없을 때는 '곰바위'에 올라 멀리 대마도를 바라보고 역관을 그리워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정이 두터웠건만 삼포왜란으로 왜국과 국교 단절을 하고, 또 신축난동으로 왜관을 부산포로 옮긴 뒤로 역관은 제포에 다시 올 수 없었다. 그런 것을 몰랐던 아천자는 변함없이 '곰바위'에 올라 대마도를 바라보며 그 역관을 그리며 기다렸다. 그렇게 오지않는 그 역관을 기다리던 '아천자'는 마침내 지쳐 몸져 눕고 그 길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일본인들은 이 '곰메바위'를 '히메이와'(姬岩 : 아름다운 여인 바위라는 뜻)라고 불렀다.
일본인이 붙인 이 이름은 일제가 이 고장을 침탈하고 입주한 뒤에 신비스러운 곰바위를 보고 만든 이야기로 짐작이 되고 원래의 전설에는 시대가 분명하지 않았다.
11. 어와, 세상사람들아
김삿갓의 조부 金益淳이 웅천현감으로 도임하는 행차가 마야령을 넘어와 여명곡 앞길을 지나갈 때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앞서 가면서 비키지 않았다. 이속들이 호령을 하여도 태연하였다.
행차가 쉬면 그도 쉬었고 행차가 떠나면 그도 앞장섰다. 사령을 보내어
"딴 길을 가거나 얼른 말에서 내리어 조아리라."라고 하니
"웅천 申좌수가 간다고 여쭈어라"
(여명리의 신씨는 제5장 4.여좌동 땅이름 '1' 여명리 참조) 라고 하고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현아에 이르러 현감은 심화를 참지 못하여 당장에 그를 불러 힐문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내가 내 말을 타고 내 갈 길을 갔는데 무슨 상관을 하시오." 하면서 현감을 나무랐다. 화가 치민 현감은 곧 그에게 태형을 내렸다.
분부대로 형리들이 매를 들었으나 형리들을 노려 보는 그의 서슬에 매를 내리치지 못하였다.
현감이 보다 못하여 직접 매를 들고 다리를 걷으라고 호령을 하였다.
그는 왼쪽 다리만 걷어 올렸다. 현감은 더욱 분하여 매에다 비상을 묻혀 때렸다.
비상이 묻은 매를 맞고 돌아간 그는 비상이 몸에 퍼질 것이 두려워 그 다리를 잘라 버렸다.
세월이 흘러 현감은 임기가 되어 다른 곳으로 전임을 하게 되었다. 현감이 웅천을 떠날 때는 '주을제'(속칭 서중리못) 근처까지만 전송을 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주을제를 지나 이속(吏屬)들만의 수행을 받고 가던 현감은 몹시 마음이 불안하였다. 도임하고서야 여명곡 申씨의 세도를 들었던 것이다. 필시 보복을 당할 예감이 들었다. 그는 작은 발티를 넘어서 큰 발티로 가지 않고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려 골짝으로 올라 천자봉을 거쳐 곰메를 지나 안민고개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때 申씨 문중에서는 청년들이 큰 발티에서 현감의 귀경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 현감이 이 '골'(洞)에서(於)'숨었다'하여 '於隱洞'이라 하게 되었고, 다음과 같은 속요도 전해졌다. (洞은 골의 뜻으로 표기할 때가 있다.)
어와 세상 사람들아
태산같은 저 산 위에
넓고 넓은 저 길 보아라
그 길이 길 아니라
신봉상의 원수로다. 구전자 : 진해시 송학동 洪承建(작고)
12. 울고개
웅동 2동 청천부락의 뒷산을 올라 국도변의 공주고개로 오는 방향에 '울고개'(우들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전라남도 고흥에 풍수 남삭이 살았는데 부모가 돌아가신 후 고흥지방의 지형을 보아 구룡용두설이 있는 명당을 찾아 안장을 했다. 그리고 나서 먼발치에서 그 지형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후손들이 가난해질 지형으로 보였다.
그래서 무덤을 파헤치고 부모의 유해를 다른 곳으로 모시려 하자 갑자기 그곳에서 용이 나타나 "여봐라! 남삭아 구룡용두설을 마다하고 십상 팔경을 찾아가느냐?" 고 크게 호령하고 사라져 버렸다.
남삭은 뒤늦게 깨우치고 다시 지맥을 따라 명당을 찾아 가다가 웅동 2동 청천부락까지 이르렀다. 거기에서 사방을 살펴본바 안골리 뒷편의 당산(사당이 있는 산)명당의 산맥이 용원앞의 잘난바다(옛날에 굴을 캐서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어서 '잘난바다'로 부르게 됨)로 빠져 있어서 명당이 아니라 역시 가난을 면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것을 본 남삭은 망령의 복이 그것 뿐이라고 체념을 하고 울면서 청천뒷산 고개를 넘어가니 그때부터 '울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13. 왜구 격퇴로 하사된 성흥사
흥덕왕 51년(826~836)(필자주 : 흥덕왕 재위 10년 밖에 안 되므로 흥덕왕 즉위부터 쳐 보면 경문왕 6년 곧 서기 866년이 된다)
왜구 10만여 명이 부산과 제포(웅천)에 침범하여 조야가 어지러워져 왕이 크게 두려워하고 중신들을 모아 대책을 물었으나 아무도 현명한 방책을 말하는 이가 없었다.
왕은 근심을 하며 자리에 드시니 꿈 속에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말하되,
"왕이 나라 지리산의 산중에 무량(無染)이라는 화상(和尙)이 있으니 금산(金山) 보개여래(寶蓋如來)의 후신이라 불가사한 신력(神力)을 거느리고 다니므로 가히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할 인물이니라. 또 서남쪽에 산이 있어서 일러 불모(佛母)라고 하고 산명수려하고 상서로운 구름이 항상 떠서 참을 닦는 사람이 찾을 만한 곳이 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느낀 바가 있어서 사람을 보내어 화상을 모셔 와서 분부를 내리시니 화상은 팔판산 철마봉(鐵馬峯)으로 올라가서 금석장(金錫杖)을 재(嶺)에 꽂고 왼손으로 배를 두드리니 그 소리가 마치 포성처럼 진동하고 문득 금갑신장(金甲神將)이 산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지라 왜구는 이것을 보고 놀라 물러가고 말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시고 무염화상을 국사(國師)로 봉하고 평장사(平章事) 류춘우(柳春雨)를 시켜 그 은혜 갚음으로 구천동(九川洞) 관남리(官南里)에 절을 지어 성흥사(聖興寺)라 하고 사전(寺田) 360결(結)과 사노(寺奴) 백호(百戶)를 하사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성흥사는 뒤에 어떤 연고로 대장동 뒷산으로 옮겨졌고, 현재의 위치에 정착한 것은 세 차례나 옮긴 끝에 이루어졌다.
14. 장복산의 이인 김덕주
그의 성은 김씨라고 하나, 이름은 '덕주'라고도 하고, '덕조'라고도 하였다.
경화동 조천마을에 많이 살고 있는 선산 김씨의 30대 손이면서 족보에는 올라 있지 않았다.
100년은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이다.
그는 장복산 가장 높은 꼭대기에 있는 큰바위 옆에 바위들을 붙여서 지은 바윗집에서 살았다.
혼자서 근처에 있는 바위를 짊어지고 날라서 지었다고 한다. 출입문 역시 바위로 한짝문을 만들었는데 보통 사람은 도저히 열 수도 없었다.
농만한 바위를 등에 지고 절벽을 오르는 것을 보고 나물 캐는 아낙네들이 "아제(아저씨), 뭐 하는기요(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응, 누고(누구냐)?"하면서 바위를 내려놓는데 바위는 굴러 떨어지는 일이 없이 절벽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장차 난리가 나면 양식으로 하겠다면서 비지나 엿 찌꺼기를 모았고, 평소에는 술지게미나 솔잎을 주식으로 하였다. 밥이 먹고 싶을 때는 제피내(현 경화동 조천마을)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와서 얻어 먹었다. 그러면서 해질 무렵, 소나기가 내리면 설거지를 걱정하고 집 밖에 나서는데 얼마 안 가 그 바윗집에는 불이 켜졌다고 한다.
언젠가는 친척들과 같이 부산에 갈 일이 있어서 경화역에서 기차를 탈 때에 그는 굳이 걸어 가겠다 하여 헤어져 부산역에 도착해 보니 어느새 그가 먼저 거기에 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예언을 잘 하였으며 그 가운데 후세까지 남은 몇 가지는
1) '흰다리'가 오면 나라가 망한다.
2) '한일거리'에 큰 도시가 생길 것이다.
3) 장시(5일장)가 옮겨 올 것이다.
4) 웅동에서 뱀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 올 것이다.
5) 벌통 같은 집에 살게 되면 세상 다 된 줄 알아라.
와 같은 말이다. 이것을 풀어보면
1)은 이 고장에 군항을 설치하려고 측량을 하러 다리에 흰 행건을 두르고 최초에 들어온 일본 해군 육전대였고
2)는 '한일거리'가 도시계획으로 '경화동'이란 격자형 도시가 된 것을 뜻하고,
3)은 물 해안통(풍덕개)에서 3ㆍ8일로 열리는 장시가 경화동 으로 옮겨온 것을 뜻하고,
4)는 웅동에서 서진해까지 송수관이 부설된 것을 뜻하고,
5)는 오늘날 아파트를 뜻하여 그렇게 주택난 시대가 오면 인심도 각박해질 것을 예언한 말이 되어서,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머리카락은 자라나는 그대로 두어서 치렁치렁했다. 지금도 머리를 단정히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덕주 머리'같다고 한다.
그가 살고 있던 바위집을 '덕주집' 또는 '덕주바위'라고 하였으며 그 집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풍화로 무너져버렸다. 200m쯤 서남쪽에 그가 쓰던 샘이 있는 데 그것을 '덕주샘'이라고 부른다.
높은 산 바위틈에서 사철 변함없이 물이 나서 요즈음도 그 샘을 신성시하고 그 물로 거기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사람도 있다.
이인 김덕주는 초인의 힘을 지니고 축지법을 썼으며 예언을 하고 보통 사람과 다른 생활을 하면서 속세와 절연하고 있다가 어느날 일본 헌병의 불심 검문을 받고 그에 불응하고 대항을 하였다.
뒤에 일본 헌병이 장복산까지 수색을 하러 오는 것을 보고 그 길로 김해 방면으로 피신을 하여 여생을 마쳤다.
일본인은 이런 전언을 듣고 김덕주를 '선인'이라 하였고 그가 살던 바윗집을 '선인굴'(仙人窟)이라 하였다.
(진해시 경화동 1441. 金在錫 71세 구전)
15. 장수바위
웅천 1동 북부동 얼음개산에는 '장수바위'라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웅천 남산에 왜적이 성을 쌓아 포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걸음이 빠르고 활을 잘 쏘는 천리장군이 산맥을 타고 화살처럼 빠른 걸음으로 이 곳에 왔다.
천리장군은 남산을 마주보는 이 바위에서 왜적을 겨냥하여 수많은 왜적들을 사살하였다.
그러다가 왜적들이 진을 옮겨갔으므로 서울로 되돌아 가려고 하였는데 마침 안개가 자욱하여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이에 천리장군은 방향을 잘못 알고 달려가다 그만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지금도 그 바위에는 천리장군의 발자국과 왜적을 겨냥할 때 무릎을 꿇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16. 천자봉에 얽힌 전설
집이 가난한 주씨 가문에 총각 보재기(잠수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지내느라고 아버지 시신을 신봉(3년간 땅에 묻지 않음) 해 놓고 매일 바다에서 해산물을 따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때 중국의 한 지리박사가 자기 아버지가 죽자 머리만 잘라서 짊어지고 명당자리를 찾아온 것이 웅천이었다.
산세를 둘러보니 이곳이 틀림없이 천자를 탄생시킬만한 명당인데 바닷속이어서 자기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궁리하던 중 마침 총각 잠수부를 만나 이야기하려고 가까이 갔더니 잠수부 역시 부모상을 당한 표시를 하고 있어서 잘 되었다고 생각한 지리박사는 잠수부를 보고 이 바닷속 밑에 들어가면 미륵(부처님)이 있을 것이니 당신 아버지 머리는 왼쪽에 걸고 내 아버지 머리는 오른쪽에 걸어두면 당신이나 내가 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주씨는 쾌히 승낙하고*자기 아버지 머리는 왼손에 지리박사 아버지 머리는 오른손에 들고 물속에 들어갔더니 과연 미륵이 있었다.
막상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미륵이 눈을 크게 뜨고 인상이 하도 험악하여 앞에서는 도저히 걸지 못하고 뒤로 돌아 부처의 뒤에서 걸고 나왔다. 기다리던 지리박사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미륵이 너무 무서워 뒤에서 걸었다."고 솔직히 말했더니 무릎을 치면서 그것도 당신의 복이라면서 당신은 웅천에 있지 말고 멀리 떠나라고 하면서 서로 헤어졌다.
주씨는 그길로 멀리 떠나가 중국의 서울 근처에 도착했는데 산위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큰 능을 발견하고 그 능의 비석 뒤에서 쉰다는 것이 잠이 들어서 밤이 깊어서야 깨어났다. 그때 능 앞에 예쁜 처녀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처녀의 기도를 엿들으니 "아버지, 지금 오빠는 반란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꼭 오빠가 승리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자가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결국 주씨는 이 처녀와 인연을 맺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처녀는 당시 중국 왕실의 공주였다.
하루아침에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된 주씨는 어느날 궁궐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가 한 곳에 머무르니 용안과 옥이 있었다. 호기심에 용상에 앉아 왕관을 쓰고 옥새를 목에 걸고 있었다.
이 때 밖에서 왕자가 승리하여 이제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대관식을 하려고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주씨는 겁이 나서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서 떨고만 있었다.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선 왕자는 매우 놀랐지만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주신 천자라 생각하고 무릎을 꿇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고 천자로 모시게 되었다.
왕자는 대신이 되어 여러 대신들과 회의를 열어 정승을 임명했는데 추대된 정승이 다름아닌 웅천에서 만난 지리박사였다고 하며, 자기 아버지 머리를 왼쪽에 걸었기 때문에 정승을 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17. 학이 나오니 가세가 기울다
장천동 태봉 마을에 한 부호가 살았으나 몹시 인색하여 아무리 어려운 이웃이 있어도 도와 줄 줄 몰라 '구두쇠 영감'이라고 불렀다.
어느 이름난 지관이 웅천 방면으로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이 구두쇠 영감 집을 찾아 하룻밤의 식객을 애걸하였다. 그는 초라한 지관의 차림을 보고 문전박대를 하였다. 박대를 받고 나온 지관은 큰 발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 지점에 명당이 있고 거기에 한 무덤이 있었다. 그 무덤의 후손을 수소문한즉 바로 문전박대를 하던 그 구두쇠 영감이었다.
지관은 짖궂게 그 집을 찾아가 선영이 명당은 아니니 이장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다.
구두쇠 영감은 그 말에 놀라 황급히 무덤을 팠다. 무덤을 파니 난 데 없이 학이 한 마리 나와 남쪽으로 날아가 지금의 학개 앞바다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뒤로 이 개를 '학개'라고 부르게 되고 그 구두쇠 영감의 가세는 기울고 말았다.
학개의 남쪽 등성이에서 앞바다의 섬들을 내려다 보면 '소쿠리 섬'은 장구를 짊어진 중을, '벗섬'은 학을, '음지섬'은 거북을 닮은 형국이라고 한다.
※학개해전 자리(鶴浦海戰址=合浦海戰址)
선조 25년 5월 7일에 거제도 옥포만에서 왜수군을 격파하고 거제도 영등포에서 유박하려고 할 때, 지나가는 왜수군이 있어서 그를 따라가서 '학개'앞바다에서 남김 없이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을 이순신이 보고한 글(임진장초 참조)에 웅천 땅 '합포'라고 하였음에도 '마산'의 옛이름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다. 지도에 '合浦'라고 오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상 출처 : 진해시청/행복진해/우리시 소개/진해의 전설
이상으로 진해시청 홈페이지와 관련한 주요자료들의 탑재를 마칩니다.
1월 말에서 2월 초로 예정된 학교의 이전홈페이지 폐쇄에 따라 여기에 탑재하였던 주요 자료들을 이곳으로 옮기느라 제법 서둘렀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하였던 자료들의 출전이 진해시청 홈페이지였다면,
출전을 인용하였던 탑재자료들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덕산초등학교 홈페이지(2006.3.1-2010.2.28 제1차 개편)/학교소개/덕산역사관/향토학습실
다음 회에는 진해시청 홈페이지에 있었던 시기별 사진(해상도는 낮음)들을 정리하며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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