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실록/진해 이야기

6-2 진해의 전설 1 (1. 달맷등의 새우 외)

진해인 2013. 1. 28. 14:11

6-2 진해의 전설

 

1. 달멧등의 새우

과거 현동 북쪽 통제부 청사가 있는 곳에서부터 동쪽의 산등을 '달멧등'이라 불렀는데 통제부 청사가 있는 곳은 본대 평지가 아니고 달멧등 허리가 부드럽게 내려진 곳으로 거기를 일본인들이 잘라 파헤쳐서 군용건물을 세운 것이다.

 

이 곳을 자르고 파헤쳐 작업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역군들이 힘차게 내리친 곡괭이 끝에서 뜻밖에 핏물이 솟아올랐다.

 

이상하게 여겨 그 둘레를 조심조심 살펴 파보니 마치 장수가 말을 탄 모습을 한 바윗돌이 나오고 그 밑에는 굴이 있고 그 굴속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이 흘러가는 줄기를 찾아 가보니 놀랍게도 큰 새우가 있었던 것이다.

물에서 새우가 나왔다든가 장수가 탄듯한 바위가 나왔다든가 하는 것은 풍수설에서 명당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닭곶  

안골포와 용원사이에 반도처럼 내민 땅을 '장곶'이라고 하는데 이 장곶에는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각시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바, 그 바위 어름에 임씨 문중에서 부친의 묘를 쓰려고 하니 땅속에 석곽이 있었다.

자연스런 석곽이라 반가이 여기며 거기에 안장을 하였다.

그 뒤로 후손들은 기운이 일어 집안이 흥하고 가산이 늘어갔다.

그러나 석곽에 모신 것이 딱딱한 돌바닥이라 사후에도 편하지 않을 것 같고 불효막심한 생각이 들어 이장을 하려고 무덤을 파서 석곽을 열고 시신을 거두어 내니 신기하게도 흰 닭이 나와 날아갔다.

닭은 바다를 건너 웅천 연도 앞 솔섬의 북쪽 곶에 앉았다.

그 후 그곳에서는 새벽이 되면 닭울음 소리가 들려 그 솔섬 북쪽곶을 '닭곶'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3. 도미의 전설 

도미는 일개 평범한 무명의 백성이었으나 자못 의리를 알며 그 아내 또한 옥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절개가 굳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백제의 넷째 임금 '개루왕'(128~166)이 이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무릇 부인의 덕은 비록 정결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나 만일 어두운 때 사람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써 꾀인다면 능히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고 하니,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본디부터 측량하기 어려우나 신의 처만은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두 마음을 가지지 않을 사람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이를 한번 시험하고자 일을 꾸며 도미로 하여금 궁중에 머물게 하고, 가까운 신하 한 사람에게 왕의 의복을 입히고 기마로 밤을 타서 도미의 집에 가게 했다. 먼저 사람을 시켜 왕이 왔다고 알리고 거짓 왕이 도미 부인에게 말했다.

"짐이 오래 전부터 그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 오다 오늘 도미와 내기를 하여 너를 얻게 되었다. 내일은 그대를 맞아들여 궁녀로 삼게 되었으니 이후로 그대 몸은 짐의 것이니라." 하며 겁탈하려 하였다.

도미의 처는 옷깃을 여미며 말하기를

"국왕이 망령된 말씀을 하실 리 없을 것이니 어지 순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청하옵건대 대왕은 먼저 방에 드십시오. 저는 옷을 갈아 입고 들어 가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와 잠시 후 계집종을 곱게 꾸며 그를 모시게 했다.

뒤에 왕이 속임을 당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없는 죄를 덮어 씌어서 그의 두 눈을 뽑은 뒤에 사람을 시켜 작은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보냈다. 그리고는 그 처를 불러 강제로 능욕하려 하였다.

그러자 도미의 아내는

"이제 남편을 잃었으니 홀몸으로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하물며 왕을 모시게 되었는데 어찌 감히 분부를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월경으로 몸 전체가 더럽고 냄새도 나니 다른 날에 깨끗이 목욕을 한 뒤에 오겠습니다."

천연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매 왕은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도미의 처는 그 길로 강가로 달아났으나 강을 건날 배가 없어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문득 난데 없는 조각배 하나가 물결을 따라 왔다. 도미의 처는 그것을 타고 '泉城島'에 이르러 천행으로 아직 살아 있다는 남편을 만나 풀뿌리를 캐서 먹으며 목숨을 보존하다가 드디어 배를 타고 고구려 '蒜山'에 이르러 살곳으로 정하자 고구려 사람들이 이들을 불쌍히 여겨 의복과 음식으로 도와 주므로 그들은 마침내 여기에서 일생을 마치었다.

 

이 전설에 따라 청안동에 있는 무덤을 두 가지 근거에서 도미의 무덤이라고 도씨 후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첫째는 '泉城島'에서 천행으로 남편을 만나 '蒜山'에 이르러 살곳을 정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 근처 가덕도에 '天城里'가 있고 낙동강변 하류에는 '蒜山'이 있어서 그로써 유추하고

둘째는 이 무덤에서 신비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주민들이 '왕릉'이라고 전하여 왔다는 점이다. 즉 성묘를 하거나 묘 관리를 잘 하면 그 집안이 흥하여 서로 성묘를 먼저 하려고 다툰 일이 있고, 소나 개가 묘역 안에 들어가면 즉사를 하는 일도 있었으며, 어느 날 청천 마을에 사는 한 어부가 바다에 나가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피로하여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내 집에 불이 났으니 꺼 달라.'하여 부리나케 일어나 마을로 돌아와 보니 무덤에 불이 나 있어서 끈 일이 있었다.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묘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앞바다게 내다 버려서 파도가 치면 쇳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4. 돌배를 타고 왔다는 공주  

수로왕 즉위 7년(서기 48년, 후한 광무제 24년) 7월 27일이다.

구간들이 조회를 할 때에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였사오니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간택하시어 배필로 삼으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짐이 이 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뜻이거늘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경들은 심려 마시오."

드디어 왕은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몰고 망산도(望山島)산에 가서 망을 보게 하고 '신귀간'에게는 승점(勝點)에 나아가 망을 보게 분부하였다.

그 때 문득 가락국 앞 남서쪽 해상에서 붉은 빛깔의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가 있었다. 망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등이 먼저 횃불을 올리니 배는 마구 내달아 와 배 안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뭍에 오르려 했다. '신귀간'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바로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급히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깎아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려고 하니 왕후는 엄숙히 말했다.

"나와 그대들은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등은 돌아와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옳게 여겨 '유사'를 데리고 대궐에서 남서쪽으로 6천보 쯤 되는 곳에 가서 만전(장막으로 된 임금의 임시 궁궐)을 치고 그 곳에서 맞이하기로 하였다. 왕후는 산밖의 別浦 나루에서 배를 대어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있었다.

거기에서 왕후는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그것을 폐백 삼아 산신령에게 바쳐 제사를 지냈다. 왕후에게는 시종해 온 두 사람이 있어서 이름을 '신보'와 '조광'이라 했고, 그들의 아내는 '모정'과 '모량'이라 했고, 그 밖의 노비들까지 합쳐 20여 명이 있었다.

또한 왕후가 가져온 화려한 비단과 의상 그리고 검은 주옥, 패물 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왕후가 왕이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다가오게 되자 왕은 나아가 정중히 맞이하여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었고, 시종해 온 신보, 조광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알현하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시종 내외들에게는 방 하나씩을 주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에게는 한 방에 오륙 명씩 들어가게 하고는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향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를 깔아 자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왕후가 가지고 온 금, 은, 보화와 비단들은 군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왕과 왕후는 침전에 드니 왕후는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입니다. 성은'許'이고 이름은 '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금년 오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꿈에 황천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한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이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니 너는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 곳으로 떠나거라.'라고 하셨답니다.

저는 배를 타고 증조(蒸棗 : 신선이 사는 곳에 있는 좋은 과일)을 찾고 하늘에 가신 반도(蟠桃 : 복숭아는 3천년만에 한 번씩 열린다고 전함)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이렇게 감히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오. 그래서 왕비를 맞으라는 신하들의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하오." 라고 왕이 답을 했다.

왕은 드디어 공주와 혼인을 했고, 함께 두 밤을 지낸 후 또 하루 낮을 지냈다. 그리고는 황후가 타고 온 배를 돌려 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으로 각각 쌀 열섬과 비단 30필을 주어 그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는 8월 1일에 본궁으로 돌아오는데, 왕은 왕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왕후의 히종해 온 신하들도 수레를 나란히 했으며, 그들이 가져 온 이국의 패물들도 모두 수레에 싣고, 서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막 정오가 되려 했다.

(중략)

수년 후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 중편 6년(189) 3월 1일에 왕후께서 붕어하시니 보수 157세였다. 김해시 '구지봉'의 동북쪽에 안장하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가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닻을 내린 그 나루의 마을(渡頭村)이름은 '主浦村'(혹은 임개)이라 하고, 왕후가 비단 바지를 바쳤던 그 산 언덕은'綾峴'(비단고개),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닷가를 '旗出邊'이라 부르기도 했다.(後略 : 原文 省略)

돌배를 타고 왔다고 하지만 돌로 만든 배가 아니라 '석탑'을 싣고 와서 그렇게 통칭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 석탑은 왕후의 능곁에 안치되어 있다.


5. 마고 할머니의 하강 

경화동에서 동남쪽으로 보면 등대가 있고 그 등대 곁에 섬이 둘 있는데 이 섬을 '도투마리섬'이라고 한다.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밀물)는 두 섬으로 보이지만 바닷물이 나가버리면(썰물) 두섬이 아니고 이어진 한 섬으로서 그 모양이 마치 도투마리 같아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아득한 옛날, 하늘에서 길쌈을 하는 신선인 마고 할머니가 베를 맬 때가 되면 이곳에 내려와서 그 섬을 도투마리로 하고 지금 등대 있는 곳에 잿불을 놓아 제황산 기슭 속천 바다에 있는 바위(속천부두 왼편)를 끌개(끄시개)로 하여 베를 매고 나면 다시 하늘에 올랐다고 한다.

지금도 모란개(행암 동편 해변)에 있는 바위에 발자국 같은 흔적이 보이는데,

그것은 그 때 마고 할머니의 발자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6. 부엉동 산신령의 분노

진해관광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공원이 조성된 일대를 '제황산'이라고 한다. 고유명은 '부엉등'또는 '부엉산'이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이 산세가 투구를 닮았다고 '가브토산'이라고 하던 것을 광복 후 개칭하면서 제황산으로 하였다.

풍수설에 이르기를 부엉등 북쪽에 제왕이 태어날 명당이 있다고 한다. 임금이 날 산봉우리를 임금이 나지 못하게 일본인들이 눌러서 러.일전쟁 승전 기념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그 탑을 세울 때 산신령이 나타나 탑을 짓지 못하게 현몽을 하였으나 듣지않아 낭패를 보았다는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산신령의 노여움

 

1. 첫 번째 현몽

부엉등에 일제가 러.일전쟁 승전 기념탑의 건립공사를 시작한 어느날, 묘법사(부엉등 동쪽기슭에 있었음) 주지의 꿈속에 백발노인이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나타나 준엄하게 일렀다. "일본해군의 무도한 자들이 나의 머리를 깍아버리니 상처를 입고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다. 일본 해군사령관에게 일러 공사를 중지하도록 해라. 내가 시키는 말을 듣지 아니하면 재앙이 내려질 것이다"

묘법사 주지는 이를 전했으나 사령관은 코웃음만 쳤다.

아니나 다를까 진창선 개설을 축하하는 날 일본인들을 가득 실은 함선이 현동의 부두에 입항하다가 전복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2. 두 번째 현몽

공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부엉산 산신령은 다시 묘법사 주지의 꿈속에 초조해진 모습으로 나타나서 " 공사를 즉시 중지하고 본래 대로 다듬지 않으면 더 큰 변이 일어날 것이다"

묘법사의 승려가 또 사령관에게 알렸으나 들은 체도 않았다. 그 후 공사현장에서 석재를 가득 싣고 오르던 케이블 5대가 쇠줄이 끊겨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니 중국인 석공과 잡역을 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피해가 전혀 없었고, 일본인 감독과 석공들이 죽고 크게 다치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산신령님의 두 차례의 현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공사를 진행하여 1929년에는 기념탑의 준공을 보았다.


3. 세 번째 현몽

심히 맥이 빠진 부엉산 산신령이 아주 쇠약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마지막 경고를 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기차에 화재가 발생하고 또 영화관람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일본인 관객 107명이 불타 죽는 끔찍한 두 사고가 일어났다.


7. 삼현육각을 멈추어라  

웅천현의 유생들은 지방 차별 때문에 과거에 응시을 해도 낙방을 시켰다. 과거에 급제를 못하는 유생들은 가까운 김해나 함안 등지를 생장지로 하여 응시를 했다.

 

지방 과거라고 하는 '향시'는 각 도내의 고을을 돌아가며 보이고 있었으나 웅천현 만은 제외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끝내 웅천 고을 사람임을 내세워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있었다.

 

풍호동 '찬샘골'에서 1784 (정조8년)에 태어나 서당과 향교에서 수학한 '홍희지'(洪羲之)는 글이나 말의 재주가 뛰어나 고을 사람들이 장래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지역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떳떳하게 웅천 고을을 내세우고 응시를 하였다. 그렇게 응시하였으나 워낙 문장이 탁월하여 여러 차례 (읍지에는 아홉번이나 하였으나 과장이 아닌가 싶다) 초시 (향시)에는 합격하였다.

 

그러나, '회시'(會試 : 초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치르는 과거, '진사ㆍ생원시'라고 통칭하였다.)에는 미치지 못하여 보통 사람이라면 체념을 하겠지만 그는 늙음을 잊고 공부를 하면서 계속 응시를 했다.

 

마침 1859 (철종 10년)년에 증광시(增廣試)가 있었다. 그 때 나이는 75세였다. 체력으로 보아 마지막 기회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상경을 하였다. 과장(科場)에서 시제를 보는 순간 영감이 번득였다. 그는 거침없이 글을 지었다. 생애를 걸고 한 과거 공부를 늘그막에라도 빛을 볼 수 있게 되리라 믿었고, 여생은 향토 후진들이나 길러야 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결과를 기다렸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또다시 급제자(합격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 석자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한 지역 차별, 그는 자기도 모르게 통곡이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웅천 고을에 태어난 것이 죄란 말인가? 아이고 아이고......"

폐부를 찌르는 때 아닌 통곡 소리는 시관들의 시선을 모았고, 마침내 왕이 초지를 가져오게 분부하였다. 시권을 본 왕은 "허허! 명필이로고, 중국에는 고지(古之) '왕희지'라 하더니 조선에는 금지(今之) '홍희지'로 구나"하며 감탄하였다.

 

이래서 그는 합격자의 대열에 올랐고 '사마방목'(司馬傍目 :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음)에는 '웅천'사람 '홍희지'라는 이름 석자가 오늘날까지 선명하게 전하고 있다.

합격은 하였으나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집에 돌아올 노자가 부족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강원도의 문중에서 어느 부호가 홍진사를 도와 삼현 육각을 앞세운 축하 행렬을 이끌고 이 고장까지 와 주었다.

 

이 일행이 먼저 당도하여 쉰 곳이 지금의 '대야동'(隊也洞)이었다. 여기에도 말도 쉬고, 악사도 쉬어서 삼현 육각을 멈추게 한 것이다.

 

'대야동'이란 이때에 이 '무리'(隊)가 여기에서 먼 걸음을 '끝내었다.'(也)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사스러운 급제를 축하하는 도문(到門) 잔치'는 자은동의 '암자골'에서 베풀어졌다. 이런 뒤로 "웅천에 나도 지(제)난 탓이라"는 말이 생겼다.

 

1862년, 78세로 영면하였으며 80세 되는 해에 '절충장군 용양 위부호군 겸 오위장'으로 추서되었다.

 

시집과 문집 '장우가'(藏于家)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재담(才談)을 잘하던 그의 일화가 있어서 참고로 들어보겠다.


서울로 회시를 보러 가는 어느날 대구의 어느 집에 과객으로 들렀을 때의 일이다. 다른 과객과 수인사를 나누는데 "소생은 '웅천'을 안태본으로 하는 '홍희지'올시다" "하아! 예. '해우창생'(海隅蒼生)이로군요!" (바다 한쪽 구석에 사는 상스러운 백성이란 뜻)하며 한 과객이 그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예! 그러나, '대구'는 '웅천'의 소산인 줄 아옵니다." (웅천 앞바다에서 대구(大口)가 많이 잡히던 때라 이렇게 응수를 하며 내 아들과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청도에서 온 한 문객이 "해우 창생인 주제에 너무 거만하지 않소?" 그말이 떨어지자 말자 "'청도'는 '대구 알'(아래)이렷다." 하며 이번에는 이렇게 하대로 응수하여 '내 손자와 같음'을 암시하였다.

듣고 있던 집 주인은 '바닷가 웅천고을'사람이라고 멸시하였다가 재치 있는 응수로 역공을 당하는 두 문객이 안타까와 시비가 되기 전에 만류를 했다.

회시를 치르고 웅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청도 회덕 고을에서 날이 저물어 또 어느 집에 문객으로 들르게 되었다.

방안에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문객들이 일제히 "해우창생 반갑소이다." 하며 반기니 사랑지기는 또 부엌으로 가 "해우창생 한 상이오"하고 외쳐 밥 한 상을 더 차리게 알렸다.

'해우창생'이란 말을 처음 듣는 부엌데기들이 무슨 짐승이 들어 온 줄 알고 우루루 나와서 사랑채로 가 문밖에서 수근거리며 문구멍을 내어 '해우창생'을 찾아 보려 했다. 그런 기미를 알아챈 그는 "해우창생 여기 있네"히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


8.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라 

옛날에 '광석골'(장천동 뒷산에 黃石岩이 있는 골짜기)에 배생원이라는 이가 날마다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천자봉에 올라가 나무를 하고 있으니 바위 위에 백발 노인 두 사람이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배생원은 그도 장기에 취미가 있는지라 나무하던 도끼를 세워 자루를 지팡이로 삼아 서서 장기두는 것을 구경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나 어느 순간 장기를 두던 두 노인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어이없이 사라져 가는 두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려고 짚고 있던 도끼자루를 드니 자루가 썩어 있었다.

어이없이 마을로 돌아왔으나 세월이 어떻게 흘렀는지 손자 대, 증손자 대가 되어서 그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 바위를 '장기바위'라 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중국 진(晋)나라 우희(虞憙)의 '우희(虞憙)지림'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같다.

지금 모내기 노래에 '저기 가는 저 구름 어데 신선 타고 가나?'라고 앞소리를 하면 '웅천하고 천자봉에 놀던 신선 타고 가네'라고 뒷소리를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이 전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웅천이라고 함은 당시 이 곳이 웅천현 관하였기 때문이다.)

혹 이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하는 이가 있는데 이것은 천자봉 전설에 따른 것이다.

 

출처 : 진해시청/행복진해/우리시 소개/진해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