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사건으로 사망한 조선인은 최초 보도에서 4명으로 나왔습니다.
이는 조선인과 함께 활동사진을 보러 간 세 사람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며 조선인은 1명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조선인에 대하여 심층분석합니다.
육군기념일을 맞아서 활동사진을 보여주는 무도장에는 일본인들만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3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경화동에 거주하는 朴二植의 2녀 朴點伊(14세)가 진해시가 일본인 과자점 상천(相川)에서 1928년부터 아이를 돌봐주는 일(고용살이)을 하고 있었는데, 이 날 주인집 아이 1명은 업고, 2명은 데리고 가서 구경하다 4명이 모두 사망하였다」고 보도하였습니다.
부친 박이식이 기자에게 밝힌 글을 따라갑니다.
『내 딸은 2년 전부터 일본사람 집에서 고용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날에는 그 주인집 아이 한 명을 등에 업고 두 명은 데리고 가서 구경을 하고 있다가 네 명이 함께 무참히도 죽고 말았습니다. 가난이 원수로 내 자식을 내 집에 두지 못하고 돈 몇 푼에 남의 집에 보냈다가 이런 참혹한 꼴을 당하니 그 원통한 말이야 어찌 다 하겠습니까마는 대동지환(大同之患)이니 단념할 수 밖에 없습니다.』하며 매웠던 눈물이 떨어진다.
어려웠던 일제강점기 우리 국민들의 팍팍했던 삶의 단면을 잘 나타낸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인 과자점이었던 상천(相川)은 어떤 과자점이었을까요?
1930년 진해선(진해역-창원역 간 철도) 개통 당시에 진해에는 두 곳에서 진해콩(鎭海豆)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한 곳은 원조(元祖)라 하며 민간에 판매를 하였고, 다른 한 곳은 제조본포(製造本鋪)라며 상표 등록까지 하고 해군에 납품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도 원조 논쟁이 암묵적으로 있었던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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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鎭海要覽(岡萬吉. 1930)
왼쪽의 상천상점(相川商店)이 朴點伊가 아이들을 돌보며 고용살이를 하던 가게입니다.
귤통(橘通)은 지금의 진해역에서 중원로터리를 거쳐 남원로터리에 이르는 남북간의 도로명이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중앙극장의 남북 도로변에 점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유일한 조선인 희생자 박점이는 이렇게 일본인 아이 3명의 활동사진 관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였다가 참변을 당하는 것으로 14세에 채 피우지도 못한 채 아까운 삶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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