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사/웅동초등학교

웅동초등학교 연혁

진해인 2013. 1. 15. 16:28

웅동초등학교의 초기사는 현 웅동중학교의 전신인 사립계광학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립계광학교사는 웅동초등학교 연혁지(재직 시 필자 정리), 웅동중학교 연혁 등을 참고하되 일제강점기의 보도자료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웅동공립보통학교 개교 이후 광복까지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용원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겸무교장 이등애조(伊藤愛造)에 의한 학교사 소각(8월 19일)으로 자료 복원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기록에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첫 탑재자료의 일부를 수정하였습니다.(1932.9.1 초대교장 및 2011.9.1 교장 대수, 하단 사진)


 

   1911.10.20. 마천리에 창동학숙(昌東學塾) 설립 개교

            설립자 겸 교장 문석윤(文錫胤)1)

1914. 6.  . 사립계광학교(私立啓光學校) 설립인가2) 초대교장 김창세(金昌世)

1919. 4. 3. 독립만세운동 전개3)

1921.12. 2. 고등과 증설

1922. 4. 1. 제2대 배익하(裵翊夏) 교장 취임4)

1922.10. 9  교지 이전(마천동 144-8번지)5)

1930. 9.31. 제1학기 종료 후 폐교6)

1931.10. 1. 웅동공립보통학교 신청 期成會 조직

1932. 8.20. 웅동공립보통학교(熊東公立普通學校) 설립인가(4학년제)7)

1932. 9. 1  웅동공립보통학교 개교(개교식 10월 1일). 초대교장 배익하(裵翊夏)

            전 계광학교 교사를 가교사로 사용8)

1933. 4.26  신교사 낙성9)

1938. 4. 1  웅동공립심상소학교(熊東公立尋常小學校)로 교명 변경

1941. 4. 1  웅동공립국민학교(熊東公立國民學校)로 교명 변경

1945. 9.24  광복 후 재개교(8학급 편성)

1981. 3. 1  병설유치원 설립인가(1학급)

1996. 3. 1  웅동초등학교(熊東初等學校)로 교명 변경

2009. 3. 1  경상남도교육청 지정 교원능력개발평가선도학교

2011. 9. 1  제31대 조옥자 교장 취임1

2012. 2.16  제76회 졸업식(졸업생 계 6,060명)

2012. 3. 1  교육과학기술부 요청 도지정학교보건연구학교(정책학교) 운영


1)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전 : 동아일보 1927.11.19. 1칸 서당에 동리 수십명의 아동에게 신문화를 보급하였다. (1879-1913) 연도는 본 기사, 일자와 서당명은 학교측 기록을 참고하였다. 학교의 기록에는 『熊東 地域 馬川洞에 이병두, 文錫胤 등이 會同하여 總務를 배익태로 하고 校長을 金昌世로 하여 昌東學塾을 設立 開校하였다. 頭洞의 漢文書堂이었던 "금동재"에서 授業을 始作하였으나 學童이 날로 늘어나 草家三間을 지어 熊東面民會館을 兼用하였다. 그러나 日帝는 認可되지 않은 學校라 하여 韓國人을 設立者로 認可를 해 주지 않고 彈壓을 하였으므로, 啓光學校의 設立認可를 推進하게 되었다.』로 되어 있으나 본 신문기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2) 출처 : 주1)과 같다. 大正 3년도에 金昌世씨 외 수인의 동지와 협력하여 각 방면으로 활동한 결과 5,000여원의 거액을 裵翊夏씨 외 수십인의 동정을 받아 교사를 건축하고 啓光學校라는 교명으로 대정 3년 6월에 학무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3) 啓光學校 敎員과 在學生, 留學生들의 緻密한 準備 아래 地域住民과 함께 馬川里 냇가에 모였다. 주기용의 獨立宣言文 朗讀과 함께 小沙面事務所를 거쳐 水源池쪽으로 고개를 넘어 熊川으로 들어가면서 熊東地域 獨立萬歲運動을 展開하였다.  

4) 출처 : 주1)과 같다. 裵在晃씨 외 4씨가 열심히 남녀 250여명에게 의무교수를 하여 오던 바 문석윤 교장은 불행히 작고하게 되니 후계로 김창세씨가 교장으로 취임한 후 교무에 진심갈력(盡心竭力)하였으나 경비의 곤란으로 폐교의 비운을 당하게 되었다. 이곳 저축조합의 출자금 2,000원 중에서 반액을 제공하게 되어 관계자 일동은 열심집무하던 중 大正11년에 지방유력자의 활동으로 12,000여원의 거액을 제2차 동정으로 받아 협착(狹笮)한 전교사는 학생의 기숙사로 정하고 다시 500여평의 基地에 광대한 건물을 신축하여 350명의 농촌무산자제를 교수하여 오다가 교육사업과 몸과 전 재산을 희생한 김교장은 부득이한 사정에 사직을 한 후 배익하씨가 추천되었다.  

5)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전 : 동아일보 1922.9.24. 10월 상순경 전부 준공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상순의 마지막날로 잡았다.  

6) 以後에 家庭事情으로 轉學을 하여 工夫를 繼續할 수 없었던 學生들을 小沙洞에 講習所를 만들어 篤志家 曺明奎 等이 設立한 熊東公立普通學校가 設立될 때까지 獻身的으로 敎育을 맡아 指導를 繼續하였다.  

7) 조선총독부관보 1695호(1932.8.30) 조선총독부경상남도고시 제79호 8월 20일부 인가. 학교명 웅동공립보통학교 소재지 창원군 웅동면 마천리  

8)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전 : 동아일보 1932.10.4. 연혁지에는 『1932.9.1 第 1, 2學年 兒童 合計 75名으로 1學級을 編成하고 校舍는 所沙里 集會場을 臨時 使用하고 職員 1人으로 擔當』및 『1933. 2. 1. 馬川里 內 私立啓光學校 基地에 2敎室 校舍와 校長舍宅 1棟을 新築 起工』한 것으로 되어 있다.  

9)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전 : 동아일보 1933.4.25


1932년 10월 1일 웅동공립보통학교 개교기념사진입니다.

뒤에서 2번째 줄의 3-7번째 분들이 학교의 교원들로 보입니다. 일본인들에 밀려 옆쪽에 앉아 있습니다.

이 중 6, 7번째 분들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다음 회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진해공립보통학교(현 경화초등학교)의 개교기념사진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창동학숙 1대, 사립계광학교 2대 등 사립 3대 제외, 일제강점기 공립 5대 포함(계광학교 배익하 중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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