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면
제4절 여명기의 향토교육
1. 용연사숙(龍淵私塾)(주13)
1) 위치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여명로 25번길 55(여좌동 577번지)
2) 설립 시기 : 1891년(明治 24년) 1월 10일 이전
3) 이후 변화 : 1907년 일본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좌천리 이전 후 폐쇄
4) 교과목 : 漢文, 通史, 小學 등
5) 수학생 : 金秉玉(사립대정보통학교 설립원 중 1인) 등
(주13) 용연사숙은 여명리의 사숙(서당)이 군용지에 편입되면서 좌천리로 이전한 것이다. 사립대정보통학교 설치인가원의 設立者 及 敎員 履歷書에 설립자 중 한 분인 김병옥(金秉玉)은 진해면 좌천리(左川里)의 용연사숙(龍淵私塾)에서 漢文, 通史, 小學, 大學, 中庸, 論語, 孟子, 傳, 書傳, 周易을 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履歷書(주14)
原籍 慶尙南道 昌原郡 鎭海面 慶和洞 百九十番戶 現住 仝上 私立大正學校設立員 金秉玉
學歷 明治 二十四年 一月 十日부터 慶尙南道 昌原群 鎭海面 左川里 龍淵私塾에서 漢文, 通史, 小學을 學함. (이하 줄임) 右 金秉玉 |
(주14) 출처 : 사립대정보통학교 설치인가철(현 경화초등학교로 사립대정학교를 조선교육령의 보통학교규칙에 의거 사립대정보통학교로 인가를 득하기 위한 설립인가원이다.)
(주15) |
(주15) 출처 : 국가기록원 일제시기 건축도면 아카이브(진해양어장부지평면도/1). 1927년 수산시험장진해양어장을 조성하기 위하여 여명리 일대의 땅을 측량한 「진해양어장부지평면도」로 축척은 1/600이다.
☞ 25면
■ 좌천리와 서당의 유래(주16)
1. 여명리(餘明里)는 처음에 여명곡(餘明谷)이라 불렀으나 주민이 많아지면서 ‘여명리’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내수면연구소가 있는 쪽으로 흐름을 돌리기 전의 ‘한내(‘동류천’이라고 하였다) 서쪽의 마을이었다. ‘여명리’는 1899년의 ‘웅천현지도’에 처음으로 나온다.
2. 좌천리(左川里)는 ‘한내’의 왼쪽에 사람이 살게 되어 마을을 이루면서 이름하게 된 곳으로 ‘호구총수’에도 나온다.
3. 서당(書堂)골
일제의 군항 설치 계획으로 ‘여명리’에서 주민이 밀려나기 전 그 곳(현 양어장 일대)에 신(申)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서당을 세워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 서당이 있던 곳을 이름한 것이다.
서당 자리에는 지금도 돌담이 남아 있다. 이 신씨의 정착에 대하여 야은(野隱) ‘신태우(申泰佑)’ 유고에서 다음과 같이 내력을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 내자직장(內資直長)으로 있으면서 단종의 손위에 불만을 가지고 벼슬을 그만두고 경상북도에 낙향하여 살던 신영정(申永貞)(諱)의 후손되는 순(眴)(諱)이 웅주[熊州. 당시의 웅천현(熊川縣)을 말함]의‘여명리(餘明里)’에 이사를 하고 후손을 가르쳤다.
(주16) 출처 : 진해의 땅이름 이야기 pp. 130-131.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2000
여명리와 좌천리(주17) | 진해양어장 항공사진(1945년)(주18) |
(주17) 지도출처 : Perry-Castañeda Library Map Collection(KOERA CITY PLANS CHINHAE). 1912년 ①+② 여명리, ③+④ 좌천리, ④ 요새사령부가 소재한 곳이며 요새사령부 서쪽을 좌천리라 이름하였다. ⑤ 大手通(대수통)의 연와공장이 소재한 곳으로 요새사령부 아래의 철도 주변을 신좌천리(新左川里)로 불렀다.
(주18) 출처 : 경남도민일보(2007.6.24)/1945년 진해 항공사진 발견. 출전 : 제주대 지리교육학과 소장 사진을 확대 편집하였다.
☞ 26면
4. 서당골의 흔적
■ 한석봉의 천자문(千字文)(주19)
(주19) 철종 12년(1861년) 겨울에 전주(완주)에서 간행하였고 본문은 겹 17장으로 되어 있다.
26면 「2. 사립경명학교」로 이어집니다.
자료의 인용 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학교사 > - 실록(1911-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웅천현 향청 외 (0) | 2016.02.18 |
---|---|
경명학교, 대정학교 (0) | 2016.02.17 |
진해 도천 (0) | 2016.02.15 |
고장의 자연환경 (0) | 2016.02.12 |
고장의 역사 (0) | 2016.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