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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농악의 뿌리를 찾아서

진해인 2015. 12. 31. 07:07

진해문화원 발행 「진해문화 제13집(2015년 12월 28일 발행)」54-70면에 실린 원고를 소개드립니다.

진해지역에는 정초에 지신밟기와 뒷풀이인 치기나칭칭나네가 널리 행하여져 왔지만 지금까지 그 유래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습니다.

본 내용은 약 4년 전 박인순(현재 만 91세, 서울 거주)에 의한 3회에 걸친 구술 녹취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약 340여년 전부터 우리 고장에서 전승되어 온 진해농악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임을 알려드립니다.

 


 

 진해농악의 뿌리를 찾아서

- 조천풍물사를 통해 바라보다 -

도천초등학교장 박건춘

 

. 진해의 농악

진해의 농악은 왜적의 침입과 각종 질병,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는 숭고한 의식으로 3개 지역에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동부지역(웅동)은 안골포수군만호진에서 개교한 사립경명학교(私立競明學校) 나발대의 진군악이 용원농악으로 발전하였고, 중부지역(웅천)은 생계 유지를 위해 남자들을 바다로 보내야 했던 섬여인들의 애환이 서린 연도여자상여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또 서부지역(행암~비봉)은 메구, 메굿으로도 부르고 있는 풍물이 전승되어 왔지만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따라서 이곳 서진해지역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농악의 발자취를 조천풍물사를 통해 바라보고자 한다.

 

. 조피천과 풍물의 시작

진해에는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고, 삼한시대에는 포상팔국(蒲上八國) 중 하나였던 읍락국가(邑落國家)가 웅천을 비롯한 현재의 진해지역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왜구의 침입이 잦아진 14세기에서 16세기 후반까지는 인구수의 감소를 가져온 것으로 웅천현읍지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진해에서 다시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가져온 것은 조선이 건국 후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태종 7(1407) 부산포와 제포(薺浦. 내이포로도 부른다)를 개항하고, 세종 8(1426)에는 부산포와 내이포((乃而浦. 제포) 외에 염포를 추가하여 삼포를 개항하면서 부터였다.

삼포왜란(1510)1592년 발발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삼포는 한때 폐쇄되었다가 16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여 국교가 회복되면서 제포만 다시 개항하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이 지역의 왜인들로부터 국토를 지키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고, 안정된 농작물의 확보를 위하여 웅천현에 주을제(注乙堤. 현 서쪽 1), 옹점제(瓮店堤. 현 서쪽 15), 태봉제(台峰堤 현 서쪽 15), 소곡제(蔬谷堤. 현 서쪽 20) 4개소의 저수지(堤堰)를 축조하였다. 소곡제가 축조되었던 당시의 경화동 서쪽지역은 제언의 이름에서처럼 채소를 주로 재배하는 밭농사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웅천현 중면 조피천리는 현재의 경화동과 병암동을 경역으로 하였다. 이 지역 중에서 현 경화동 서북지역(구 경화2가동)에 경상북도의 현풍(玄風)과 청도(淸道)에서 밀양박씨 박해욱(朴海旭. 입향조)의 일가와 친척 및 가솔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왔는데, 밀양박씨조천문중(이하문중이라 한다.)에서는 이들의 입향 시기가 현종 14(1. 1673)으로 풍물을 비롯한 각종 민속들도 이 때 함께 유입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

(1) 박해욱의 교지

                  (2) 1945년 경화동 주변 항공사진<1>

 <주1> (출전) 제주대. (출처) 경남도민일보(2007.6.24.)에서 조천리 부분을 재편집하였다.

지금의 흔골과 대밭골에서 발원한 하천의 풍부한 물을 구릉지의 밭에 끌어들이고, 소곡제에 가두어 둔 물로 하류지역에 까지 계단식논을 조성함으로써 식량을 획기적으로 증산할 수 있었다. 문중에서는곡식을 수확할 때 만들어진 껍질(造皮)이 온 내()를 하얗게 덮었다.’는 이야기가 수확 때마다 회자되면서 구전되어 왔다. 하천 이름이 조피천(造皮川)이 되고, 이 이름이 마을 이름인 조피천리(造皮川里)가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진해농악은 경상북도 현풍과 청도에서 유입된 풍물이 웅천현의 풍속과 혼합되면서 지금의 풍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영남농악의 문화권 중에서도 현풍과 청도농악에 보다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문중에서는 후학의 양성과 미풍양속의 보존을 위하여 마을에 30여 평의 인공연못(경화동 1466번지 )과 정자(경화동 1441번지 )를 조성하고, 그 동편에 재실과 사당(경화동 1442번지 )을 지어 문중행사를 치렀다. 재실에 딸린 남쪽의 사랑채()는 서당으로도 활용하면서 창고에는 각종 관혼상제와 풍물을 할 수 있는 물품들을 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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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의 밀양박씨조천문중 종손가() 확대도 및 위치 안내

 

. 실화 이후의 점진적인 풍물의 중단

조선시대 중종 이후 소곡제를 축조하면서 이루어진 마을로 호구총수(戶口總數 1789)에 기록된 최초 지명은 조피천리(造皮川里)이다.

조피천의 명칭은 본 문중의 준호구에 1822(순조 22)까지 조피천리와 자연명칭인 조피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1825(순조 25) 호구의 기록방법이 변경되면서 1864(고종 원년)의 준호구에서 조피천리 2, 조천리 1건으로 병용된 사례를 제외하면 모두 조천리(造川里)로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에 호구단자들을 3년마다 작성한 점을 감안하면 조피천, 속고천(현 속천), 행랑암(현 행암) 3자의 부락명칭은 1825년부터 조천, 속천, 행암과 같이 2자로 정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피천풍물이 조천풍물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1825년부터로 정리할 수 있다.

 

 (4) 1819년 조피천리의 준호구

 

 (5) 1825년 조천리의 준호구

 

이렇게 150여년을 이어온 풍물이 위기를 맞은 것은 182611() 문중에서 발생한 종손가의 실화(失火 4)<주2> 이후 친척들이 떠나기 시작하였고, 갑오개혁(1894)의 신분제 철폐로 가솔들마저 떠나면서 풍물을 행할 인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었다. 풍물도구와 관혼상제용품 등의 물품들도 이후 망실되어 갔는데, 문중에서는 풍물이 중단된 시기를 1896<주3>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2> (3) 종손가의 규모는 약 7,000(동서 140~180m, 남북 130~160m 정도의 길이), 동쪽과 서쪽에 위치한 친척가를 모두 합하면 약 10,000평 규모였으며, 제피천의 본류를 동쪽 내부에 두고 있었다. 종손가에 99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구전하는데, 각 가구에 10명 내외의 노비(賤口)들을 두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3)의 경역에 약 40여 가구, 500명 정도가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2(11)의 북풍을 타고 종가 남쪽에 있었던 집들이 대부분 전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朝奉大夫首兵曹參判(조봉대부수병조참판)’을 지낸 박윤신(1714-?)1740(경신) 3월 무과에 급제하였. 그의 일기문(日記文) 6권과 문집(文集) 14권 등 20권 중 10분지 일(十分一)인 문집 2권이 소실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문중의 대부분의 문서들이 이 때 소실되었는데, 7일간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다수의 친척들이 집과 재산을 잃고 마을을 떠났다고 구전하고 있다.

<주3> 박무창이 1826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던 족보의 내용들을 타지역의 밀양박씨 문중을 일일이 방문하며 복원하고, 흩어졌던 문중의 조천마을 재이전을 추진하였던 기간이 사망 전 10년 동안으로 구전하고 있다. 그는 사망 전 (2) (경화동 1464-3)로 이사를 하였고, 문중의 주요 문서와 물품들은 박경팔에게 인계하였다. 박덕수가 혼인하여 이곳으로 분가(分家)하였는데, 이후 박무창의 사손(祀孫)이 되어 부친의 문중 집사일을 이어받았다.

 

(6) 웅천현감에게 보낸 간찰<주4>

 

<주4> 1826(去年) 11월 임술시(壬戌時. 오후 730분에서 930분 사이)에 종손(박기진)의 실화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1827(정해년) 5월 박기진, 기집, 기흠, 기성 등 4형제가 성주(웅천현감)에게 올린 간찰(簡札)로 조부 박윤신의 훈공(勳功)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다. 1834(갑오년) 2월 초9() 유생 17명이 향중(鄕中)에 보낸 간찰을 참고하면 조부의 공로(功勞)에 대한 보상(補償)을 청원한 것으로 보인다.

 

한학을 공부하고 서당(私塾)을 운영하며 문중의 집사를 맡아서 하였던 박무창(朴武昌. 1846-1907)은 문중의 주요 문서들과 관혼상제 및 풍속 등의 자료들을 사용한 후 사랑채의 광()에 정리하고 보관하였다.

 

. 조천풍물의 재창설

1825년 조천리로 개칭된 조피천리에는 1907년부터 일제의 진해 군항 건설로 인하여 경화동 신시가지에 강제로 쫓겨난 주민들과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한 다수의 사람들이 1914년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인구의 급증으로 조천리는 경화동 1(현 경화초등학교 남쪽과 제피천과 병암천 사이의 구 경화1가동 신시가지 지역이다.), 경화동 2(조피천<현 중초천>과 제피천<제피내로 현 경화2가천> 주변으로 구 경화2가동이다.), 경화동 3(병암천 주변으로 석동과 이동을 경계로 하는 구 경화3가동으로 현 병암동이다.)로 분구되었는데, 주민들은 신시가지 조성 지역만 경화동으로 불렀고, 그 외 지역은 조천리(제피내<주5>), 병암리로 불렀다. 풍물을 재건하여 전승한 곳은 경화동 2구의 조천리였다.

 

 

<주5> 조피천은 형님내로 큰개울로 불렸고, 제피천은 아우내로 작은개울로 불렸다. 조피천이 조천으로 개칭되면서 제피천의 ()’로 바꾸어 부르거나, ’제피천내로 부르는 동안 이 탈락되어 제피내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후 제피내는 내의 이름이면서 마을 이름으로도 속칭(俗稱)되었다.

 

 

(7) ‘사립대정보통학교 인가서류철중 조천리의 학자금기부서약서<주6>

 

<주6> 19131015일 서명한 문서이다.() 6, () 15, () 3, () 2, () 1, () 1, () 1, () 1, () 1, () 1, () 1, () 1, () 1, () 1로 서명한 총 36가구 중 박씨를 제외한 30가구가 포함되어 있어서 다수의 사람들이 이주하여 정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다수를 차지하는 선산김씨(善山金氏)는 똘똘개(귀현리)에서 집단이주한 것으로 전한다.

 

아래의 내용은 20101120일 문중회 묘사 전일 사랑채에 모여 담소를 나누던 중에 필자가 그 동안 의문을 품고 내력을 알고자 하였던 가마가 있는 사진 두 장을 소개하며 가마나 풍물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다른 친척들과 함께 내려온 박인순(朴仁順. 1926년생. 박정봉의 자.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벽산5단지아파트 거주)에게서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8) 창원군 상남면 용동리

 풍물패와 가마

 

1925년 초에 일본에서의 개인사업을 정리하고 조상을 모시기 위하여 귀국한 박유화(朴有化. 1865-1949)<주7>는 사업으로 번 수입 중 일부를 문중사업에 사용하기로 결심하고 이해 102(815)에 박인수(朴仁首), 박인옥(朴仁玉), 박경팔(朴京八) 등 문중 대표 3명과 그의 집(경화동 1460번지. 현 아람아트빌라 )에 모여서 심도 깊은 의논을 하였다. 토의 결과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하는 것이 시급하다는데 뜻을 같이 하고 1826년 문중에서 발생한 실화 이후 풍물 및 관혼상제용품 및 풍물용품의 점진적인 망실로 중단되어 온 문중의 미풍양속을 우선 복원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11월 중순에 그의 부담으로 네 아들 수봉(守鳳), 재봉(在鳳), 길봉(吉鳳), 정봉(正奉)과 이들 형제의 사촌인 남복(南福) 5명을 마산으로 보내어 풍물도구와 가마 등 혼례용품 일체를 주문 제작 및 구입하게 하였다.

지신밟기치기나칭칭나네의 소리를 보관하고 있던 박소도(朴小道)12월에 조천마을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희망자를 모집하였고, 그의 집(경화동 1256번지 ) 사랑채()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제작하고 기능보유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틈틈이 연습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1926215()(13) 박소도의 집에서 명맥이 끊긴지 30년 만에 풍물패를 재창설하였다. 정초를 맞아 셋째 아들 길봉을 시켜 제작한 회갑연 초대장을 지인들에게 보내고 219(17) 오후 3시 반경부터 많은 손님들이 방문한 잔치자리에서 풍물의 첫 발표를 하며 조천풍물의 재창설을 알렸다.

 

<주7> 박유화는 문중 어른들과 협의 하에 1910년부터 서진해지역 등에서 경화동 신시가지의 조성이 완료된 1914년까지 종손가의 가산을 정리하고 일본을 알기 위하여 10년만 일본에 다녀오겠다며 아들 정봉과 함께 떠나 개인사업으로 돈을 벌어 1925년 귀국하여 약속을 지켰다. 사립대정보통학교 인가서류철(1916) 학자금기부서약서(19131015)’에 나타나 있는 조천마을에 선산김씨 등 유입주민이 정착한 시기와도 일치하는데 박유화가 일본으로 떠난 시기는 1915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유화는 의 곳에서 1933년 경화동 386-1번지의 신시가지로 이사하였다.

 

                     사랑채와 마당                                사랑채 정면                                 사랑채 동쪽(왼쪽) 방

 

               광 왼쪽(동)                              광의 내부                                       광 오른쪽(서)

(9) 박소도의 사랑채()와 광<주8>

 

<주8> 사랑채는 주로 동쪽방을 사용하였으나 비좁을 때에는 서쪽방도 사용하였다. 광의 각 벽면에는 상단에 2단의 목재선반을 부착하여 각종 물품들을 얹어서 보관하였다.

 

이후 해마다 13()에 모여 2일간 풍물용품을 정비한 다음 5()부터 대보름(15)까지 약 11일간 풍물(지신밟기)을 행하였는데, 조천마을에 거주하였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조계의 형식으로 운영하였다. 조천풍물은 일제강점기의 진해면민줄다리기 등 지역의 주요 행사에 참여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모임 장소는 집사를 맡은 박소도-박덕수(朴德守)의 집(19561464-3번지 , 1969년 이후 1447-1번지 )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행암리부터 시가지의 조선인 거주 전 지역을 대상으로 걸립(乞粒)의 형태로 진행하였고, 주인은 보답으로 한 말 가량의 곡식을 내어놓았다.

625전쟁이 끝나고 풍물을 이끌던 박소도의 사망 후 군에서 제대한 비슷한 나이의 조천마을 출신 청년들로 1956년부터 상조계 형식의 조천재향친목계(造川在鄕親睦契)를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풍물이 널리 알려지면서 초청을 받은 창원군 지역까지 풍물을 행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 조천풍물을 모방한 경화3가동(현 병암동) 등 지역 풍물패의 창설로 인한 활동 영역 축소와 회원들의 노령화로 2004년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조천풍물은 1960년대 이후 경화3가동을 비롯한 진해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도7) 1950년대 후반 및 1990년대의 풍물 사진

 

조천재향친목계에서는 이 밖에도 매년 11()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낸 후 오후에 구 경화2가동사무소와 철도 사이의 공터()에서 편을 나누어 자치기를 하였고, 계원 가정에 상이 발생하면 위의 모임 장소에서 상여를 제작하고 장지까지 직접 운구를 하였다.

 

 

(8) 의 발인제 (3) 위의 공지(경화동 1463-1번지)

 

. 풍물의 사설

조천풍물은 주마당인 지신밟기와 뒷풀이마당인치기나칭칭나네로 구성되어 있다.

 

1. 지신밟기<주9>

지신밟기는 음력 정초에 지신을 진압함으로써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과 풍작 및 가정의 안택(安宅)을 기원하는 민속놀이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성주지신풀이, 조앙지신풀이, 장독지신풀이의 삼신풀이를 하였고, 주인의 장소 추가 요청이 있으면 조앙지신풀이의 사설에 장소만 바꾸어 가며 고방()지신풀이, 굴뚝지신풀이, 마구(마굿간)지신풀이도 행하였다.

 

집으로 들어갈 때(대문 밖에서)

주인 주인 문 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

 

성주지신풀이(마루에서)

어여라 성주야 이 성주가 누 성주고 | 이집 가정에 따른 성주 천년성주 만년성주 | 성주님 모실라고 왼 새끼 둘리치고 | 황토 파서 금토 놓고성주님을 모시고자 | 성주님을 모셔 놓고 성주님 근본이 어디요 | 경상도 안동땅에 제비원이 본일래 | 강남에서 나온 제비 솔씨 하나 물어다가 | 거지야 봉산에 흩였더니 그 솔이 점점 자라 | 밤이면 밤이슬 맞고 낮이면 태양을 받아 | 황장목이 되었구나 도리야 지동이 되었구나 | 앞집에 김대목아 뒷집에 박대목아 | 나무 베러 가자스라 나무 베러 갈라하니 | 연장 없어 못가것네 설흔 세 명 역군들이 | 설흔 세 가지 연장을 채워 곡닥곡닥 도꾸 치워| 알래망태 집어 옇고알래 망태 짊어지고 | 뒷동산을 올라가니 나무 한 주름늘어섰네 | 그 나무 관상을 보자 하니 동쪽으로 뻗은 가지 | 까막까치가 집을 지어 서쪽으로 뻗은 가지 | 온갖 잡새가 집을 지어 어어 그 나무 부정하네 | 또 한 등을 지쳐보니 나무 한 주름 늘어섰네 | 그 나무 관상을 보자 하니 나무 임자는 산신령이오 | 나무 뿌리 북을 돋아 하느님의 옥황상제 | 물을 주어 키운 나무 성주님 한 지동이 분명하네 | 아랫마을에 초군들아 나무 끝에다 줄을 매고 | 능청능청 땡겨주소 실거등실거등 톱질이야 | 넘어가네 넘어가네 낙락장송이 넘어가네 | 우두에 우풍수고 좌두에 좌풍수고 | 서울이라 삼각산에 세를 놓고 훑어보니 | 훑어졌네 훑어졌네 대명산이 훑어졌네 | 용의 머리에 터를 닦아 설흔 세 명 역군들이 | 못가래에 줄을 매고 옆가래에 놋줄 매고 | 밀치락닥치락 터를 닦아 네모 반듯이 닦아 놓고 | 호박주추 유류지동한 동배기 잘라다가 | 대들보로 마련하고 또 한 동배기 잘라다가 | 도리야 지동을 마련하고 젙가지를 떼어다가 서까래를 마련하고 | 네모 반듯이 지어놓고 성주님을 모셔보자 | 성주님을 모셔 놓고 성주님 관상을 보자 하니 | 성주님이 분명하네 이 성주에 드는 아기 | 아들 애기를 놓거들랑정승 판서를 마련하고 | 딸 애기 놓거들랑 정절부인을 마련하소 | 손재수 관재술랑 물알로 소멸하고 | 돈 있고 은 있는 사람은 이 집으로 들어오소 | 이 집에 대주양반 동서남북을 다 댕겨도| 나무눈에 꽃이 되고 꽃은 피어 임이 되어 | 재죽재죽 상내 나네 일년하고 열두 달에 | 삼백하고 육십일에 가련하고 열 석달에 | 하루 아침 같이 넘어가고 안가태평을 점지하소

 

조앙지신풀이(정지<부엌>에서)

울리자 울리자 조앙지신 울리자 | 이 조앙을 모실 때 삼일로 날을 받아 |

사립에 금토하고 상탕에 메()를 짓고 | 중탕에 목욕하고 하탕에 손발 씻고 |

촛대 한 쌍 벌여 놓고 향을 피워 놓고 | 그래 모신 조앙님네 천년이나 울려주소 만년이나 울려주소

 

장독지신풀이(장독대에서)

어여라 장독아 어여라 장독지신을 울리자 | 이 장독이 누 장독고 이집 가정에 따른 장독 | 천년 장독 만년 장독 하느님의 옥황상제 | 상탕에 머리 빚고 중탕에 목욕하고 | 하탕에 손발 씻고 소복단장 곱게 하고 | 진주 남강에 물을 실어 창원 덕산에 소금을 받아 | 한 독에는 된장을 담고 한 독에는 간장을 담아 | 장독마다 장을 담아 장독마다 꿀을 실어 | 장맛이 꿀맛이라 꿀맛도 장맛이라 변치 않고 꿀맛이네 | 이 집에 대주 양반 동서남북을 다 댕겨도 | 발끝마다 도와주고 만인간이 도와주고 | 어여라 장독아 장독지신을 울리자 | 천년이나 울리자 만년이나 울리자

 

집을 나갈 때(대문 안에서)

잡귀잡신은 물알로 만복을 들여오소<주10>

<주9> 금토(禁土) 뿌리기 거제 도리와 기둥 도끼 채워 얼레(새끼 타래) 넣고 지켜 당겨 나침반 원기둥꼴로 만든 주춧돌과 후세에 물려줄 기둥 곁가지 낳거들랑 다녀도 남의

<주10> 필자의 부친 박덕수(朴德守)pp.193-196. 진해시. 1985)’을 편집할 때 기록하여 전해준 것이다. 누락된 의 부분은 첨기하였다. 황정덕. 진해시사 pp.540-543. 진해향토문화연구회. 1987’과 구통인(口通人)은 다르지만, 내용의 변화 없이 병암동(당시 경화동3)의 풍물에 그대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치기나칭칭나네<주11>

지신밟기를 마친 후 집주인의 대접이 융숭할 때, 하루의 풍물을 모두 마치고 집사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풍물의 마지막 날인 대보름 밤에 마을의 달집태우기를 할 때 등 다양한 뒤풀이(여흥)로 행하였다. ‘쾌지나칭칭나네와 같은 장단을 사용하였는데 두 놀이가 발생한 시기의 선후는 알 수 없다.

 

(는 후렴이며 치기나 칭칭 나네로 되풀이 된다.)

하늘에는 별도 많고시내 갱빈엔 자갈도 많고헌 누더기 이도 많고남의 집 메누리 말도 많고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이팔청춘 소년들아백발 보고 웃지 마라죽는 것은 섧잖애도늙는 것이 더욱 섧다검은 머리 백발 되고희던 갓은 황금 되네살아생전 놀아보세세월은 여류하야덧없이 늙었나니춘삼월 호시절에잔지방에 속잎 나고노고지리 순질 띠고어화세상 벗님네야꽃 피고 잎필 찌게(적에)놀고나 놀아보세아니 놀면 무엇 되나산천초목 젊어 오고우리 임은 백발 되네어떤 사람 팔자 좋아고대광실 높은 집에부귀공명 누리면서호강호식 지낼 찌게우리 겉은(같은) 무정세월멋없이 늙어졌네(후렴)<주12>

 

<주11> 본 타령도 앞의 주와 같은 경로로 에 수록되었다. ‘황정덕. 진해시사 pp.539-540. 진해향토문화연구회. 1987’의 구통인(口通人)은 다르지만, 내용의 변화 없이 병암동의 풍물에 그대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사용하였는데, ‘쾌지나 칭칭나네쾌지나치기나로 소리를 변형시켜 불려져왔다. ‘갱빈은 조천리 북서쪽의 강변등(江邊嶝)’을 지칭하는 것으로 강변경빈, 갱빈, 갱비등으로 변이된 표현이다.

<주12> 조천풍물패 재창설 과정은 서울 금천구 시흥동 벽산5단지아파트 거주 박인순(朴仁順. 1926119일생. 박유화의 손녀)의 구술내용과 문중문서 및 필자가 선친(박덕수)으로부터 생전에 들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지신밟기치기나칭칭나네의 소리는 선친이 당시 진해시청에 근무하던 김병숙(필자의 외숙부)에게 전하여 에 수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소리가 만들어져서 부르기 시작한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낱말은갱빈이다.‘갱빈강변(江邊)’의 변이음으로 문중의 족보에 강변등(江邊嶝)으로 기록되어 있다.

 

 

                  (9)  강변등의 위치                                       (10) 강변등이 최초 기록된 문중 족보

강변등은 경화동 서북쪽의 비람산(飛巖山. 장백산 남쪽 비람목 왼쪽의 산) 아래의 흔골과 장백산(長伯山. 주봉 덕주봉) 아래의 대밭골에서 발원한 세 줄기의 물이 이룬 하천(조피천)을 따라 흐르면서 그 사이에 만들어진 등의 이름이다. 초기에는 (3) 왼쪽의 흔골과 가운데 하천 사이의 등(?)을 지칭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오른쪽의 낮은 등(?)까지 확장하여 부르게 되었다. 강변은 세월이 흐르면서 강빈, 갱빈, 경빈<주13>, 갱비 등의 이름으로 변이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에서 강변등은 박사하(朴思夏)의 족보에 처음 나타난다. 족보의 소실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형제들의 족보로 유추해 보면 사망 시기는 1814년 전후가 된다. 따라서 치기나칭칭나네19세기 초에 발생하여 지금까지 구전되어 온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주13> 황정덕. 진해의 땅이름 이야기 p.149.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2000

<주14> NAVER 지도에 나타난 이름인데, 필자의 유년시절인 1960년대에도 강변등을 경비등’, ‘갱비등및 등을 생략한 갱빈으로 불렀다.

 

. 풍물 및 혼례용품

조천마을의 풍물 및 혼례에 사용하였으나 활동 중단 후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는 관련 용품들은 다음과 같다.

 

1. 풍물용품 

 

2. 혼례용품 <주15>

<주15> 1960년대까지 계원 및 인근 마을의 혼례에 가마와 함께 사용하였으나 예식장에서 혼례를 하면서 사용이 중단되었고 가마도 망실되었다.

 

. 풍물의 전승을 위한 노력

1896년경 풍물의 중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문중에서 조천풍물의 재건과 전승을 위하여 노력해 온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이 름

출생-사망

활동 기간

관계(5)

주요 활동

1

박무창(朴武昌)

1846-1907

1864-1907

증조부

정리 및 보존

2

박유화(朴有化)

1865-1929

1925-1929

44

풍물 재창설

3

박경팔(朴京八)

1857-1944

1907-1926

증조부

보존

4

박소도(朴小道)

1904-1956

1926-1956

조부

재창설 및 활동

5

박덕수(朴德守)

1931-2009

1956-2009

활동 및 보존

6

박건춘(朴建春)

1954-

2009-

보존 및 복원 노력

 

 

 

 박경팔

 박소도

 박덕수

 박건춘

 

17세기 후반 경상북도 현풍과 청도의 이주민들에 의해 들어와 조피천리에서 토속화하며 꽃을 피운 조천풍물은 다른 민속들과 함께 웅천현의 서진해지역에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말 급변한 시대적 흐름에 의해 잠시 맥이 끊어진 풍물을 30여년 만에 재창설하였듯이 기능보유자들의 노령화로 인해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조천풍물을 온전하게 복원하고 전승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수 있다.

2016년은 조천풍물이 재창설된 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천마을에 풍물이 재현되어 흥겨운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출 수 있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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