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향교/문중행사

벌초성묘(2015)

진해인 2015. 9. 19. 07:36

9월 12일(토)는 음력 7월 30일로 그믐입니다.

문중에서는 매년 음력 8월 1일에 앞선 휴일에 벌초를 하여왔는데 금년에는 9월 12일로 결정하였습니다.

 

새벽 6시에 모여 10분에 출발해 서편 조부모님과 祀증조부님 등 3묘를 먼저 처리하고 선산으로 향했습니다.

해마다 3명이 하였는데 금년에는 나이 많은 2명이 하다 보니 시간도 좀더 많이 걸렸습니다.

 

7시 30분에 선산에 도착하니 한창 진행이 되어 있었습니다.

 

■ 벌초를 하는 동안 혼자 아래로 내려와서 도로공사로 정리된 아래쪽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른쪽이 아침을 뜻하는 흔골(昕谷)이고 깎여나간 등부분은 족보에 비람산 아래(飛巖山下)로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비람목 남쪽 봉우리가 비람산입니다. 비암이 세월이 흐르면서 비람으로 음이 변이되어 불리고 있습니다.

   안민도로 바로 아래의 1묘를 제외한 나머지 3봉분이 모두 정리되어 있어서 조금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 오래 전에 도굴로 사라져서 정리한 묘 주변입니다.

 

■ 동쪽의 계곡 건너편에 있는 박일등(珀日嶝)으로 보통은 백일등으로 부릅니다.

   처음 봉분을 조성하고 주변에 배롱나무(백일홍으로도 부릅니다)를 심은 데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백(박)일등 이름이 붙여진 시기는 통정대부를 추존받으신 치성(致聖)님의 묘를 이곳에 모실 때부터입니다.

   윗쪽에 잘려나간 바로 위에 서편에 있는 필자의 사(祀)증조부 무창(武昌)님의 두 부인 창녕조씨, 회산황씨의 쌍분이 있는 곳입니다. 창녕조씨 할머니는 정혼자로 혼례를 치르기 전에 돌아가셨는데 출가외인(出家外人)이라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밀양박씨 집안의 며느리로 먼저 자리를 잡으셨고, 회산황씨 할머니는 이후 혼례를 올리신 분입니다만 장수하지는 못하셨기 때문에 무창 할아버지께서 문중 집사로 활동하는데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 다시 선산으로 돌아와 같이 벌초를 하였습니다.

   맨 위와 바로 아래의 두 봉분이 입향조 해욱(海旭 가선대부행병조참판)의 자 사준님의 부부묘입니다.

   1673년에 위 교지를 받으셨는데 아드님 사준(社俊)이 이 시기에 부친과 같이 입향하여 이곳 조피천리(造皮川里)에서 정착을 마치도록 도운 후 부모님의 묘가 있는 현풍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 경화동 서북편 조피천리(造川里)에 뼈를 묻으신 분 중에 한 분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치성 어른은 족보에 통정대부로 나타나고 경자(庚子 1740년) 3월 행현관(行縣官)의 좌수(座首) 차정첩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좌수는 지방의 사족 대표들의 모입인 향청의 우두머리인데 보통 50세 이상의 덕망을 겸비한 분 중에서 선출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지방 행정 단위 , , , 두었던 향청() 우두머리인데, 아드님(윤신)의 과거 급제에 공을 인정하여 웅천현의 좌수로 선출되며 차정첩을 받으셨습니다.

  통정대부는 사망 시에 추존받으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친의 메모에 사헌부판사라는 부기가 나오는데 밀양박씨 다른 문중의 족보에서 확인한 것인지, 그냥 추정한 것인지는 앞으로 확인이 필요한 내용입니다.

  아래에 두 분의 묘(쌍분)가 있는데 조봉대부급병조참판을 지내신 윤신(潤身) 내외분이 주인입니다.

   며칠 전 문중서류를 다시 정리하다가 1714년 태어나 만 25세인 경신(庚申 1740년) 3월시의 무과에서 급제하신 사실을 찾아내었습니다.

   문집 14권을 쓰시고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셨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 안민도로 바로 위의 경계부분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 진해공동묘지 중턱에서 사하(思夏/時夏) 할아버지의 후손인 성희 형제들이 벌초를 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병암공동묘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문중행사 소개는 다음에 있을 묘사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