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실록/- 근대사진전시회

진해군항마을역사관 1(입구)

진해인 2014. 6. 13. 06:49

기록사랑마을_실사자료(12.19)[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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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근대사사진전시회를 개최하여 온 진해군항마을역사관에 대한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그 첫회로 건물 입구 주변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 군항제 기간 중에 본 역사관을 찾았습니다.

▷ 건물 왼쪽의 테마거리에서 특별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안쪽에 전시해 놓은 근대사 사진들이 일부 보입니다.

 

▷ 벚꽃이 만개한 중원광장에서는 청소년들을 위한 축제 준비가 한창입니다.

 

■ 진해군항마을역사관이 있는 건물 전체의 모습입니다.

 

■ 출입문의 안내화보입니다.

▷ 출입문 왼쪽의 명판에서 중앙동으뜸마을추진위원회가 운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의 유리에는 진해군항마을역사관 이용안내 화보가 붙어 있습니다.

 

▷ 문의 오른쪽 유리에는 진해중앙동마을의 역사 화보, 위에는 이곳이 역사관임을 알리는 화보, 그 아래에는 진해의 특산품인 벚꽃빵과 진해콩 판매 현수막이 위치해 있습니다.

다시 오른쪽에 편백로 25-1이라 적힌 이곳의 도로명주소판이 보입니다.

 

▷ 행정안전부 지정 희망마을 진해군항마을역사관 안내 화보입니다.

일본군인들이 앞에 서 있고, 뒤에 영해루와 팔각정 건물, 배경에 벚꽃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좌하의 작은 글씨에서 화보 도안은 박정원님이 담당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 왼쪽 출입문에 붙어 있는 화보를 확대하였습니다.

진해 중앙동 마을의 역사와 진해군항마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한 문장을 읽어봅니다.

진해는 1912년 진해면으로 출발하여 1931년 진해읍으로 승격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사람에겐 주거권을 주지 않는 일본인 시가지였다.」

사실 진해는 이곳이 군항으로 지정되고 해군진해임시건축지부가 설치되는 것에서 출발하여 1912년 진해면이 될 때 전체 시가지는 큰 틀을 완성하여 일본인들의 장옥이 시가지를 가득 채웠음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본 블로그에서 소개드렸듯이 1926년 기록에서 약 10%의 한국인들이 시가지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을 위한 시가지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한국인의 주거권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수정할 자료

1906년 일본은 ~ 방사직교형 시가를 만들었다.

1) 1906~ 강제로 토지를 매수

일본은 이 일대를 일본 해군 군항으로 만들기 위해 1907년 강제로 토지를 매수한 뒤

2) 1912년 야마타 우시다로에 의해 진해군항대시가계획도가 설계되면서

191041일부터 해군임시건축지부에 의해 진해군항이 설계되면서

 3)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사람에게는 주거권을 주지 않는 일본인 시가지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소수의 조선인들의 거주를 허용하였지만 사실상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시가지였다.


 

다음 회부터는 출입문에 있는 안내화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본 역사관이 조성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PDF 파일을 상단에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록사랑마을_실사자료(12.19)[1].pdf
3.2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