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군항마을역사관 1(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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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근대사사진전시회를 개최하여 온 진해군항마을역사관에 대한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그 첫회로 건물 입구 주변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 군항제 기간 중에 본 역사관을 찾았습니다.
▷ 건물 왼쪽의 테마거리에서 특별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안쪽에 전시해 놓은 근대사 사진들이 일부 보입니다.
▷ 벚꽃이 만개한 중원광장에서는 청소년들을 위한 축제 준비가 한창입니다.
■ 진해군항마을역사관이 있는 건물 전체의 모습입니다.
■ 출입문의 안내화보입니다.
▷ 출입문 왼쪽의 명판에서 중앙동으뜸마을추진위원회가 운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의 유리에는 진해군항마을역사관 이용안내 화보가 붙어 있습니다.
▷ 문의 오른쪽 유리에는 진해중앙동마을의 역사 화보, 위에는 이곳이 역사관임을 알리는 화보, 그 아래에는 진해의 특산품인 벚꽃빵과 진해콩 판매 현수막이 위치해 있습니다.
다시 오른쪽에 편백로 25-1이라 적힌 이곳의 도로명주소판이 보입니다.
▷ 행정안전부 지정 희망마을 진해군항마을역사관 안내 화보입니다.
일본군인들이 앞에 서 있고, 뒤에 영해루와 팔각정 건물, 배경에 벚꽃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좌하의 작은 글씨에서 화보 도안은 박정원님이 담당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 왼쪽 출입문에 붙어 있는 화보를 확대하였습니다.
진해 중앙동 마을의 역사와 진해군항마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한 문장을 읽어봅니다.
「진해는 1912년 진해면으로 출발하여 1931년 진해읍으로 승격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사람에겐 주거권을 주지 않는 일본인 시가지였다.」
사실 진해는 이곳이 군항으로 지정되고 해군진해임시건축지부가 설치되는 것에서 출발하여 1912년 진해면이 될 때 전체 시가지는 큰 틀을 완성하여 일본인들의 장옥이 시가지를 가득 채웠음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본 블로그에서 소개드렸듯이 1926년 기록에서 약 10%의 한국인들이 시가지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을 위한 시가지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한국인의 주거권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 수정할 자료
1906년 일본은 ~ 방사직교형 시가를 만들었다.
1) 1906년 ~ 강제로 토지를 매수
→ 일본은 이 일대를 일본 해군 군항으로 만들기 위해 1907년 강제로 토지를 매수한 뒤 2) 1912년 야마타 우시다로에 의해 「진해군항대시가계획도」가 설계되면서
→ 1910년 4월 1일부터 해군임시건축지부에 의해 진해군항이 설계되면서
3)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사람에게는 주거권을 주지 않는 일본인 시가지였다.
→ 일제강점기 동안 소수의 조선인들의 거주를 허용하였지만 사실상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시가지였다.
다음 회부터는 출입문에 있는 안내화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본 역사관이 조성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PDF 파일을 상단에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