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 김덕주 17(김덕주 벽화)
오늘은 덕주동산 동편의 경화대밭길을 따라 마을의 집과 담장에 그려진 벽화를 소개드립니다.
■ 청소와 바탕 도색
2013년 10월 4일 경화동으뜸마을추진위원회에서 김헌일ㆍ유원석 시의원, 지역주민, 통장, 으뜸마을추진위원 5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덕주동산 주변 주택 담장 60m구간의 담장 청소 후 바탕 도색 작업을 실시하고 퇴색된 정자 도색작업 등 환경정비를 실시했다.
출처 : 창원일보/뉴스/창원마디소식(2013.10.7)
■ 벽화그리기
벽화그리기의 출발인 담장 청소는 10월 4일 경화동으뜸마을추진위원회에서 마을주민대표님 50여분이 하셨지만, 이후 10월 12일부터 10월 18일까지 1주일간의 어려운 작업을 진행하여 완성한 것으로 예상합니다.
창원 상남동의 문구업체인 피피크루에서 맡았고 윗쪽에서 아랫쪽으로 이동하며 벽화를 그렸는데, 작업 과정은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사이트 : 피피크루/벽화/경화동 덕주동산 벽화그리기 과정(1)
■ 김덕주 스토리 벽화
김덕주 스토리는 경화동으뜸마을추진위원회에서 설계하고 피피크루에서 이를 바탕으로 벽화를 제작하였습니다만 미흡한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서 위 참고사이트에서 제시한 내용과는 조금 다르게 구성하여 소개를 드립니다.
▷ 김덕주의 삶의 터전과 제피내(조천) 마을의 풍경
장백산(長伯山)의 덕주바위에 붙여 만든 덕주동굴의 왼쪽에 덕주샘터, 오른쪽에 덕주텃밭이 있습니다.
김덕주가 내려온 제피내마을에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윗쪽(완쪽) 3채를 초가집, 아랫쪽(오른쪽) 3채를 기와집으로 그렸어야 했는데, 고풍스런 분위기를 만들다 보니 모두 초가집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초가집들의 아래 방향(오른쪽)에는 신시가인 경화동으로 경화역, 진해공립보통학교(깃발이 꽂힌 곳), 경화굴(장복산굴)이 순서대로 보입니다.
경화굴은 대체로 장복산굴로 기록되어 있는데 굴의 위치가 장복산지가 아닌 천자봉산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경화굴로 부르는 게 맞으리라 생각합니다.
신구 건축물들을 대비가 되게 표현하다 보니 이렇게 그린 것 같습니다.
경화역사(?)나 2층으로 그린 학교 건물(단층이 맞음), 경화굴이 맞다면 경화역사와 경화굴을 잇는 철도가 있어야 하고, 나머지 건물들도 수정이 필요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 평화로운 제피내(조천)마을
겨울이면 마을 아이들이 얼음을 지치던 작은 연못(현 경화동 1466번지로 1970년대에 폐쇄되었음. 철도 아래의 없어진 육구연못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의 주변에 집과 논밭이 펼쳐져 있고 가끔 까치가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마을 풍경을 표현하였습니다.
▷ 김덕주와 아이들
스토리에서는 김덕주가 아이들에게 앞날에 대한 예언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왼쪽 그림은 「벌통같은 집에 사람들이 살면 세상이 다된 줄 알아라」는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밀양 박씨 문중에서 전해지고 있는「닭장같은 집」으로 여러 층으로 건축된 집을 말하는데 그림의 표현이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덕주와 아이들의 친밀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벽화에서는 이렇게 나타낸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만 실제 예언들은 마을의 지인(선산 김씨와 밀양 박씨)들에게 말하였는데 이 말들이 아이들에게도 다시 전해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김덕주와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아이들이 이야기를 엿듣는 그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림 중 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물건은 TV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대상을 알 수 있도록 명확한 표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 김덕주의 마지막 행적
김덕주는 경화장시에서 일본 헌병의 불심검문을 받게 되자 그의 거처로 일단 피신한 후에 다시 김해 방향으로 피신하였는데, 장유면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만 전할 뿐으로 이후 행적을 감추었습니다. 빠르게 이동하는 그의 발걸음으로 축지법을 나타내었습니다.
■ 전설이 된 김덕주
제피내의 아이들이 민속놀이를 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 김덕주가 마을에서 사라진 후 세계정세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급변하고 사람들의 생활도 아주 어려워집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순수한 마을을 잃지 않고 바르게 생활해 가는데, 김덕주가 꿈꾼 인륜이 지켜지는 세상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이렇게 행적을 감춘 후에 그의 이야기는 어른들을 통해 아이들에게 이어져서 조천마을의 전설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장백산(長伯山)의 최고봉에 남아 산(덕주봉, 덕주바위)이 되었습니다.
다음 회에는 벚꽃명소 중 한 곳으로 덕주동산 뒤 안민도로에 있는 덕주터널을 소개드리면서 도인 김덕주의 연재를 모두 마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