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실록/도인 김덕주

도인 김덕주 3(흰 다리와 국권 상실)

진해인 2013. 12. 25. 07:52

김덕주는 진해의 제피내(조천) 마을에서 선산 김씨 30대손으로 출생하여 이름이 덕주(또는 덕조)라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을 뿐 그 밖의 사실들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본 회부터 김덕주의 예언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연결하며 김덕주의 삶을 재조명해 봅니다.

연재하는 내용은 어릴 때부터 필자의 선친(朴德守-2003년 작고)을 통해 들어 왔던 밀양 박씨 문중의 전래되어 온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재정리한 필자의 의견으로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흰 다리가 오면 나라가 망한다」는 예언은 1905년 12월 일본 해군 육전대가 진해에 군항을 설치하기 위하여 다리에 흰 행건을 두른 복장으로 측량하러 온 것을 지칭합니다.

이 때 김덕주의 나이를 30세 내외로 가정할 때 약 그의 출생 시기는 1875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은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었고,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널리 유포되며 미륵신앙, 도참사상 등 다양한 형태의 민간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수운 최제우가 오랜 수도(修道) 끝에 1860년 5월 7일(철종 11년 4월 5일) 경주의 용담정에서 깨달음을 얻어 동학을 창시하였고, 그의 사상은 서민을 대상으로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갑오년(1894년)의 동학혁명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보았을 김덕주도 동학(東學)을 접하면서 세상의 변화와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시천주(侍天主)를 핵심으로 선천(先天)에서 후천(後天)으로 이어지는 우주적 순환사(宇宙的 循環史)와 후천개벽(後天開闢) 등의 사상은 청년 김덕주의 정신세계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현재 구 조천리(구 경화2가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밀양박씨 후손들에 의하면 갑오개혁이 있었던 1894년 겨울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던 밀양박씨 문중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마을이 폐허가 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등을 종합해 볼 때 조천리의 대화재로 마을 주민들과 같이 집을 잃고 다른 지인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하였습니다. 또한 결혼 적령기(20세 전후)에 이르러 집의 부모님들이 어려운 가정 형편에 자신의 혼인 문제로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고심하여야 했던 김덕주는 수도를 결심하고 출가하게 되는데 그 시기는 조천리 대화재 직후인 1895년 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김덕주는 몇 년간의 수도 끝에 나름의 득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미래를 보는 예지력(또는 예언력)이었고, 그 첫 작품이 1900년 전후에 이야기하였을 것으로 흰 다리가 오면 나라가 망한다」는 예언이었습니다.

그의 에언처럼 을사년(1905년)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침탈하였고, 경술년(1910년)에는 한일병합을 감행하여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였습니다.

 

진해에서 측량을 하는 일본 해군 육전대← 출처(진해군항마을 진해근대사사진전시회)

 

다음 회에는 김덕주가 수행(득도)을 위한 거처로 삼았던 장백산(長伯山) 최고봉인 덕주바위 주변의 산세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