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사/도천초등학교

진해사건 6 (민담)

진해인 2013. 7. 27. 12:31

오늘은 진해사건의 제6화로 진해사건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를 올립니다.

흔히 부엉산 산신령의 문노, 또는 부엉산 산신령의 노여움으로 불려온 본 이야기는 당시 일본인들의 침탈로 핍박받던 조선인들의 어려운 생활상과 맞물리면서 조선의 지식인에 의해 만들어진 설화로 보이지만 우리들의 민간신앙과 정서가 잘 녹아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 이야기는 2009년 진해시에서 발행한 진해스토리 pp.100-103을 원내용을 거의 그대로 살리면서 일부에 의견을 넣거나 수정하는 등 재구성한 것입니다.

 

진해탑(본서에서는 진해관광탑으로 소개하였다)이 있는 봉우리에서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일대를 ‘제황산’이라고 합니다.

 전하는 속칭은 산세가 부엉이를 닮았다고 하여 ‘부엉등’ 또는 ‘부엉산’이라고 하고, 탑이 세워진 봉우리만을 ‘두엄봉(頭嚴峯)’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일본인들이 산세가 투구를 닮았다고 ‘가부토야마’(兜山 귤산)라고 하던 것을 광복 후 개칭하면서 ‘제황산’으로 하였습니다. 필자가 어려서 부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는 원래 제왕산이라고 하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찾으면서 산이름을 제황산으로 호칭한 데서 산이름이 탄생하였다고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며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 첫 번째 현몽 : 진해선 개통과 제삼진해환 침몰

풍수설에 이르기를 부엉등 북쪽에 제왕이 태어날 명당이 있다고 하니 임금이 날 산봉우리에 임금이 나지 못하게 그 기세를 누르고자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쓰시마해협에서 격파하고 결정적 승리를 가져오게 한 1905년 5월 27~8일의 해전을 기념하는 탑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이 공사를 시작하여 봉우리를 깎아 평평하게 한 날 밤에 깊이 잠든 묘법사(妙法寺)의 일본인 주지 아사이 간세이(旭寬成)의 꿈에 백발의 노인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 준엄하게 일렀습니다.

“일본 해군의 무도한 자들이 나의 두상을 깎아버리니 상처를 입고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다. 너는 도를 닦는 일본인 승려이니 진해 일본 해군사령관에게 공사를 즉시 중지하여 산꼭대기를 복구하여 다시는 무례한 짓을 하지 말도록 전하여라. 내가 시키는 말을 듣지 아니하면 재앙이 내려질 것이니 명심하여라.”

묘법사 주지는 날이 새자 지체하지 않고 당시 일본 해군 진해요항부 사령관에게 산신령의 노여움을 알렸으나 일본 해군 사령관은 코웃음만 쳤습니다

이를 무시한 일본 해군에서는 제황산에 탑을 세우는 공사를 계속 진행하였고, 일본 교통성에서는 진해와 창원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는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진해선(진창선으로도 불렀다) 개통은 매우 뜻이 깊어서 1926년 11월 개통 축하 기념식과 부대축하행사를 열었고 이 날 하루만은 주최측에서 무료로 교통편을 제공하였습니다.

열차나 객선을 이용하여 관광객이 진해로 몰려들었습니다. 마산에서 진해로 오려면 선편이 지름길이었습니다. 바다 경치도 즐길 수 있어서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아 마산, 진해 사이의 객선은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정오 무렵 마산에 본사를 둔 진해기선회사 소속 제3진해환(鎭海丸)이 정원을 훨씬 넘는 여객을 싣고, 좌우에도 80명씩 태운 종선(從船)을 달고 마산부두를 출항하였습니다. 도착한 배를 현동만 부두에 대려고 하면서 오른편 종선의 밧줄을 풀어 승객을 내리려 하자 왼편에 딸린 종선의 무게로 말미암아 제3진해환이 왼편으로 기울어져 승객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기울어진 제3진해환이 뒤집혀 선실에 있던 승객이 배와 같이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불과 2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근처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수병들이 비상소집을 하여 구조활동을 하였으나 연약한 부녀자 25명은 불행하게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동부두에서 참변이 있었으나 일본인들은 개의치 않고 여전히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출처 : 진해시청 공보담당관실

 

■ 두 번째 현몽 : 케이블카 추락

 “너에게 당부를 하여도 일본 해군사령관이 듣지 않아 바다에서 내 영적을 보여 주었는데도 믿지 않고 덤비니 다시 경고한다. 공사를 곧 그만 두고 부엉등을 본래대로 다듬지 아니하면 큰 변이 일어날 것이다.”

겁에 질린 묘법사 주지는 다시 사령관에게 현몽대로 알렸으나 주지를 맞은 사령관은 전과 다름없이 들은 척도 아니하였습니다

1929년 러일전쟁승전탑 공사가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제황산에 탑을 세우는 공사는 케이블카를 가설하여 석재를 실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석재를 가득 싣고 오르던 케이블카의 쇠줄이 갑자기 끊어져 벼락소리와 함께 케이블카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인 석공과 잡역을 하던 한국인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나 일본인 감독과 석공들이 사상한 끔찍한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으니 현몽을 묵살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었습니다.

 

출처(1, 2, 3) : OhmyNews 블로그/역사를 찾아/진해탑의 현재와 과거(2009.1.20 태허)
출처(4) : 한국사데이터베이스/진해기념탑신설공사설계도(철근상세도)

 

■ 세 번째 현몽 : 경화굴 화재와 진해대화재

연이은 현몽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공사 강행으로 제황산 기념탑이 완공되던 어느 날 매우 쇠약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신령님은 묘법사 주지에게 마지막 현몽을 하였습니다.

“네 놈들이 무거운 짐을 머리 위에 얹어 놓아 나는 힘이 빠져버렸다.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끝내 탑을 세우고 말았으니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하나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영적을 보여 주리라.”

이런 현몽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대한 축하행사를 하며 1929년 5월 27일 정오에 약 2만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기념탑의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일본인들은 탑의 준공을 기뻐하였으나 이듬해에는 끔찍한 두 이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 첫째 변은 성주사에서 경화굴(본서에서는 장복산굴로 기록하였다)을 지나 경화동으로 내려오던 열차가 굴 속에서 화재를 일으키며 멈추고 만 것입니다. 기관사가 점검을 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석탄을 화구에 아무리 퍼넣어도 기차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화물열차여서 승객이 없었고 다른 기관차로 기차를 끌어내어 가까운 경화역으로 옮긴 후에 수습을 하였습니다. 

출처 : 진해시청 공보담당관실(진해근대사사진전의 원자료입니다)

 

▶ 둘째 변은 그들 일본의 육군기념일인 1930년 3월 10일에 진해만 요새사령부 내의 연무장과 목공장으로 쓰는 창고를 임시영화상영장으로 하여 어린이들에게 영화를 보이려 할 때 일어난 이른바 진해사건으로 관련 내용은 생략합니다.이 참사 사건을1930년 3월 14일의 동아일보는 “실로 참극 중의 참극이다.”라고 보도하고 그 때로 보아 전 세계를 통해 영화 상영 중 일어난 참사 사건으로는 네 번째로 큰 참사라고 했습니다.

진해사건을 재구성하여 제7화에 넣을 생각이었으나 독자님들의 판단에 맡기면서 1930년 3월 10일 진해 해군요새사령부(이전 육군대학, 현 구 해군교육사령부)에서 있었던 대화재에 대한 연재를 모두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