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사/도천초등학교

일제강점기의 교가 제정시기

진해인 2013. 3. 29. 07:29

아래 세 학교의 공통점은 대한제국 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한국인 자녀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립학교라는 점입니다.

 

■ 사립계광학교(私立啓光學校) 교가

                         작사 배재황(裵在晃), 작곡 미상

 

  무한한 은혜를 주시는 여호와 우리 엄주

  반도를 긍휼코 광명한 빛 주사

  세웠네 한 학교 계광학교

→ 계광학교가 기독교 계통의 설립 학교임을 짐작케 합니다. 

 

■ 사립경명학교(私立競明學校) 교가

                         작사, 작곡 미상


  1. 조종산 높은 줄기 뒤에 솟으며

      維新社會 열심을 자랑하며

      太平洋水 如流가 앞에 솟으며

(후렴) 경명아 경명아 나의 경명 잊지 마세 어미 학교

 

  2. 곰산이 높이 솟아 우뚝 솟으며

      서양의 문명을 지세하여

      유산에 날랜 끝에 속내 나오며

이상 출처 : 진해시사 p.948, 950. 진해시사편찬위원회. 1991

 

■ 사립개통학교(私立開通學校) 교가
                         작사 李光洙, 작곡 미상

 

  1. 곰메의 바위 밑으로 맑은 샘물 솟아나네

      내도 되고 늪도 되며 구름 이러 비도 부어

(후렴) 가라 가라 아 아 내 샘 어린 아기 우짖는다.

 

  2. 곰메의 바위 밑으로 맑은 샘물 솟아나네

      별과 같은 빛을 받고 옥과 꽃의 정기 녹여

 

  3. 곰메의 바위 밑으로 맑은 샘물 솟아나네

      목마른 억조창생 골고롭게 마시어라

진해교육사 pp.92-93 경상남도진해교육청. 2009

 

이상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이 설립한 학교의 교가이며 사립대정학교는 교가가 전하지 않습니다.

이 세 학교의 교가는 언제 제정되었을까요? 

 

 

이 문제의 단서는 진해에  일본인 자녀교육을 위해 설립한 진해공립심상고등소학교(鎭海公立尋常高等小學校 현 도천초등학교)의 교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출처 : 「학교일람 병 학년말통계철. 진해공립심상고등소학교. 1917년 (협조 도천초등학교)」
               자료 인용 시 본 블로그를 통한 재인용임을 위 출처 기록과  같이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본 자료는 최초로 공개하는 광복 전 일본교육사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교육사료입니다.

 

제작자는 해군중장 동향길태랑(東鄕吉太郞) 작가(작사), 동경음악학교 교수 島赤太郞(도기적태랑) 작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총 4절로 작사되어 있는 교가의 내용은 1절에 일왕을 위한 임무에 대하여, 2절에 교사와 학생의 나라에 대한 임무, 3절에 진해의 바다와 대표봉인 천자봉을 언급학고 일왕에 대한 보은을, 4절에 이러한 임무 달성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등 황국사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작사는 한국에서 의뢰하였을 수도 있지만 작곡은 일본의 음악교사에게 의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경음악학교 교수라는 직에서 작곡가가 지금의 중등학교 교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중등학교 교사는 초등학교의 훈도와 구분하여 교수로 호칭하였습니다.

 

이 교가는 언제 제정이 되었을까요?

진해공립심상고등소학교의 연혁에 의하면 1917년 10월 3일 제정이 완료되었고, 악보는 10월 22일 학교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 한국인학교 3교의 제작시기는 어떻게 될까요?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 전까지는 일제의 무단통치기로 교가 제정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시기였을 뿐 아니라, 작사를 하였더라도 작곡을 할 수 있는 음악가(음악교사)를 구하기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제외해야 합니다.

 

삼일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미명 아래 출판물의 발행, 학교 설립 등을 대폭 완화합니다.

교가가 제정된 시기도 일본의 진해공립심상고등소학교 교가 제정에 자극을 받은 사립학교의 선각자님들(교원)이 주축이 되어 민족과 학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제정을 서둘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 사립경명학교는 작사, 작곡이 미상으로 제작연대를 전혀 추정할 수 없고, 사립개통학교는 작사자가 문학계의 거목인 이광수로 되어 있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1950년 10월 25일 5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우리나라 문단에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긴 분입니다.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1921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의 언론에 칼럼과 장·단편 소설, 시 등을 발표하였다. → 출처 : 위키백과

 

이 내용으로 볼 때 사립경명학교의 교가는 1921년 이후 학교에서 이광수님께 작사를 의뢰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사립계광학교는 작곡은 미상이지만 작사자는 배재황(裵在晃)입니다.

   배재황님은 1911년 10월 20일 웅동면 마천리에 사립계광학교의 전신이었던 창동학숙(昌東學塾)의 개교 때부터 의무교수를 해왔고, 1914년 6월 사립계광학교가 개교한 후에는 초대교장 김창세(金昌世)와 함께 지도를 하였는데, 최소한 2대 교장 배익하(裵翊夏)님의 취임(1922년 4월 1일) 이전까지 교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19년 웅동면에서 4.3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한 동안 건강이 나빠 활동력을 잃고 한동안 유유전전 하였다는 내용에서 보듯 이후 학교 근무기간은 1922년 경까지로 추정이 됩니다.

 → 본 블로그 진해이야기(11) 6-1 독립운동가 참고

 

이상 두 학교의 사례를 통해 위 세 학교의 교가가 제정된 시기를 추정한 내용을 요약하면,

춘원 이광수가 귀국한 1921년 하반기에서 배재황이 학교생활을 마감하는 1922년의 상반기의 1년(1921.7-1922-6)의 기간 중에 작사와 작곡이 추진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또 세 학교의 교가는 당시 작곡가(음악교사)가 귀했던 점을 감안할 때 한 분이 작곡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언급해 둡니다.

 

군항제를 앞두고 벚꽃이 만개를 하였습니다.

다음회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벚꽃의 명소 중 한 곳으로 자리 잡은 진해양어장이 조성되기 전인 100년 전의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불러온 다른 이름은 없었는지 양어장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