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인 2016. 3. 31.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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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입니다.

  3월   7일 창원군교육회 창립총회 (오전 1030-오후 4)

  323일 졸업수업증서수여식, 식후 표창아동 포상전달식

  427일 순종(純宗) 장의 발상에 따른 학교장 훈화

  527-29일 개교 15주년 기념 전람회

  610일 순종 장의 진해신사에서 요배식 봉행

  625일 총독부 평정(平井) 학무과장 내교 시찰

  713일 해군묘지 납골제전 고등과 2학년 남학생 참열(參列)

1022일 장경왕(長慶王) 재위신고제(在位申告祭)로 휴업

1111일 철도 개통 축하 기행렬 (오전 11시 참가)

12월   6일 대정왕(大正王) 병기(病氣) 평유(平癒) 기원 전교아동 진해심사 참배

1214일 대정왕 병기평유기원제 직원 및 고등과 2학년 아동 참열

1225일 대정왕 사망, 오전 10시 요배식


진해역(鎭海驛)

- 192210월 만주를 비롯한 대륙으로 군용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착공하였고,(주108) 1926111110시에 기념식을 하고 진해선(통해-창원 22.7km)의 개통과 함께 보통역으로 경화역과 함께 영업을 시작하였다.

- 건물의 전체구조는 맞배지붕의 사각형 평면과 오른쪽에 목조로 된 승강장이 있으며, 평면의 오른쪽은 대기실, 오른쪽은 사무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여좌동 76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가지정등록문화재 192호이다.

(주108) 출전 : 南満州鉄道株式会社京城鉄道局. 大正十年度統計年報 p.31. 南満州鉄道株式会社京城鉄道局. 1923. 출처 : 일본국립국회도서관. 토목공사에 착수한 시기이다.




출처 : 진해시청 CD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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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역(주109)과 통해역(주110)



(주109) 출처 : 김인수. 진해의 도시형성과정에서 나타난 근대건축에 관한 연구 p.72. 경남대학교대학원. 2004. 사진 출전 : 철도청. 한국철도요람집

(주110) 사진 출처 : Naver블로그/민깡군/진해선 통해역(2013.4.24.)

  

조천풍물패(造川風物)(주111)



진해농악은 경화동 조천마을(원지명 조피천리)에 경북의 현풍과 청도에서 17세기 말에 집단으로 유입된 이주민들에 의해 전래되어 밀양박씨조천문중에서 토속화되었다. 본 문중의 대화재(1826)와 갑오개혁(1894)으로 인한 신분제도 철폐로 풍물을 행할 사람이 차츰 줄어들어 1896년에 활동을 중단하였다.

1925년 초에 일본에서 조상을 모시기 위하여 귀국한 박유화(朴有化. 1865-1949)는 사업 수입 중 일부를 문중사업에 사용하기로 결심하고 이해 102(815)에 문중 대표 3명과 그의 집(조천리 1460-2)에서 모여 토의한 결과 중단된 문중의 미풍양속을 우선 복원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의 부담으로 네 아들과 이들 형제의 사촌 등 5명을 마산으로 보내어 풍물도구와 가마 등 혼례용품 일체를 주문 제작하게 하였다.

박무창(朴武昌 1846-1907), 박경팔(朴京八 1857-1944)을 거치며 지신밟기치기나칭칭나네의 소리를 보관하고 있던 박소도(朴小道)12월에 조천마을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희망자를 모집하였고, 그의 집 사랑채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제작하고 기능보유자들의

(주111)자료 제공 : 密陽朴氏杏山派造川門中會. 조천풍물패의 회비로 마련한 것으로 예식장에서 혼례를 치르기 전인 1960년대까지 조천마을과 인근마을 혼례에 사용하였다. 진해문화 제13pp.54-70(2015.12.29. 진해문화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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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받아가며 틈틈이 연습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1926215()(13) 박소도의 집에서 명맥이 끊긴 지 30년 만에 풍물패를 재창설하였고, 219(17) 오후 3시 반경부터 박유화의 회갑연에 많은 손님들을 초대한 잔치자리에서 첫 발표를 하였다. 이후 해마다 13()에 모여 2일간 농악장비를 정비한 다음 5()부터 대보름(15)까지 약 11일간 풍물(지신밟기)을 행하였는데, 회원은 조천리에 거주하였던 연령이 비슷한 성인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상조계의 형식으로 운영하였다. 모임 장소는 집사를 맡은 박소도(朴小道. 박덕수의 부. 경화동 1256)-박덕수(朴德守)의 집(19561464-3, 1969년 이후 1447-1)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행암리에서 시가지의 조선인 거주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고, 초청을 받은 창원군 지역까지 풍물을 행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 조천풍물을 모방한 지역 풍물패의 창설로 인한 활동 영역 축소와 회원들의 노령화로 2004년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조천풍물은 현재 진해 전 지역과 창원의 성산구까지 전파되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풍물용품


혼례용품


자료의 인용 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