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학교, 대정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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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립경명학교(私立慶明學校)
덕산리의 독메 주변에 취락이 이루어진 것은 고기잡이와 소금구이를 생업으로 삼기가 용이한 때문이었다. 진해만의 생선은 다른 어느 곳보다 특이한 맛을 지니고 있어서 왕실에 진상을 하였고 독메의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도 진상을 하였다. 이것은 이곳을 찾는 관리들의 영향과 경성을 오르내리는 이곳 사람들로 근대화의 물결이 이 고장에 가장 먼저 들어오게 하였다.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하던 당시 향토의 후진들에게 새로운 학문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교육을 통해 구국을 실현하려는 독지가들의 민족운동으로 사학 설립이 추진되었는데, 뒷날 사립대정학교를 설립한 분들이 주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덕산리 독메의 구 풍덕포보 자리에 1906년 3월 10일경 웅천의 개통학교와 때를 같이 하여 사립경명학교가 개교하였으며 덕산경명학교라고도 불렀다.
경명학교는 일제 해군에서 1910년 6월부터 군항 설치 공사를 위해 덕산리, 풍호리 해안 등에 비행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이 해 7월 20일에 폐교되었다.
경명학교가 폐교되어 우리 자녀들의 교육의 장이 사라질 경우에 대비하여‘경화동’이라는 새 취락을 이룰 시기에 유지들이 미리 학교 부지를 확보해 두고 새로운 사립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주20)
(주20) 참고 : 경상남도진해교육청. 진해교육사 p.92. 102, 108, 950. 경상남도진해교육청. 2009. 폐교 1년 전인 1907년 7월 덕산리의 사숙이 사립학교(덕산대정학교)로 개편하여 경명학교 폐교 때에 학생들을 수용하였고, 경화동의 교사 신축 후에 이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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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립대정학교(私立大正學校)
신학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우리 지방에도 어찬우(魚鄼愚), 홍우지(洪祐祉), 김봉규(金奉圭), 우진두(禹璡斗), 김병옥(金秉玉) 등 독지가들에 의해서 1912년 9월 2일에 사립대정학교가 설립되었다.(1912년 6월 1일 설립인가, 인가철 개교일 9월 3일)
사립대정학교는 이후 1916년 10월 1일 사립대정보통학교(설립인가 8월 25일)로 교명을 변경하여 증가하는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20년 1월 8일 창원군 웅남면 귀현리(貴峴里)의 사립동명학교(私立東明學校)(주21)(설립자 金秉先)를 병합하였다. 1920년 4월 재학생 전원이 운동장 둑에 도열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한 후 이해 6월 1일 4년제의 진해공립보통학교로 강제 개편되었다.
(주21) 동명학교는 1909년 10월 6일 마산부 웅서면 귀현리에서 개교하였고, 1911년 4학급에 교원 3명, 학생수 42명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창원군 웅남면(熊南面)에 편입되면서 귀현리가 되었다. 진해교육사에는 지례군수, 산청군수, 내장원 가의대부를 지냈으며 만석꾼이었던 김희원(金熙元)이 사재로 세운 사학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립자 김병선은 김희원의 자(子)로 재원은 김희원이 부담하고 설립자는 김병선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919년 사실상의 양교 병합이 있었고, 절차상의 통합은 1919년 9월 30일 교명 및 설립자 변경원 신청에서 마무리되었다.
개교 초청장(1912.8.28.) | 사립대정보통학교 설치인가원 | 사립대정보통학교 설치인가 |
출처 : 경화초등학교 |
1920년 진해공립보통학교 개편 직후의 교사 |
출처 : 진해시청 CD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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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감부의 교육정책과 사립학교 설립
1906년 2월 설치된 통감부는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식민지 교육의 기반을 구축할 교육정책을 구체화하였다. 따라서 통감부의 교육정책은 한국의 민족교육을 억제하고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통감부는 이를 위해 실용교육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한국인이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 갖는 것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통감부의 교육정책은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제1단계는 학제의 전면적인 개편을 통하여 관학(官學)의 체제와 교육내용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06년 8월 27일 칙령 제44호 「보통학교령」, 8월 31일 칙령 제41호 「사범학교령」, 제43호 「외국어학교령」, 칙령 제42호 「고등학교령」 등 새로운 교육령을 반포하여 종래의 교육관제 및 규칙을 폐지하고, 각급 학교의 학제를 개편하였다.
제2단계는 사립학교령과 교과용도서검정규정을 통하여 민족사학을 통제 억압하며 애국적인 교육내용을 교육현장에서 봉쇄하는 것이었다. 1908년 8월 26일자로 「사립학교령」을 공포한 통감부는 신규 사립학교는 물론 기존의 모든 사립학교까지도 소정의 절차에 따라 학부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으며, 그 후속조치로서 8월 28일 「사립학교령 시행에 관한 훈령」을 발표하여 각 지방관들에게 「사립학교령」 시행에 따른 구체적인 내용을 지시하였다. 아울러 사립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의 내용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로 1908년 9월 1일 「교과용도서검정규정」과 9월 17일 「학부편찬교과용도서규정」을 공포하는 한편, 학교설립에 적극적인 학회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학회령」을 9월 1일자로 발표하여 학회설립도 통감부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학교설립을 선도한 것은 각 지역을 연고지로 한 학회였다. 이들 학회는 교육과 식산(殖産)을 통한 점진적 실력양성운동으로 독립의 기초를 다진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교육진흥을 국권회복의 지름길로 생각하였으므로 신교육의 발전과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구국운동에 진력하였다.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 당시 민족신문들도 학교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지방유지들로 하여금 학교설립의 주체로 나설 것을 촉구하였으며, 학교설립이나 교육활동 기사를 통해 널리 국민들을 각성시켜나갔다. 특히 나라의 급무(急務)가 학교설립 및 인재양성에 있다고 하여 1906년 3월 26일 각 부·군에 학교설립을 강조한 광학조칙(廣學詔勅)이 반포되자, 각 지방에서는 군수가 봉칙(奉勅)의 의미로 학교설립에 앞장섰으며, 지방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 시기에 설립된 사립학교 수는 1908년 현재 관 공립학교를 포함하여 5,000여 개교, 학생수도 20만 명에 달하였으며, 「사립학교령」 발표 이후 그 수가 감소했음에도 1910년 7월 1일 학부에서 조사한 결과, 사립학교 수가 총 2,082개교로 집계되어 전국 각지로 확대된 사립학교 설립운동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주22)
(주22) 출처 : 여주군史/자연과 역사/통감부의 교육정책과 사립학교 설립운동의 확대에서 이하 내용 재인용. 『관보』, 1908년 9월 1일. 17일, 『관보』, 1906년 8월 31일, 9월1일, 김정해, 1987, 「1895~1910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 『역사교육논집 제11집』, 역사교육학회, 133쪽, <표 1>1905~1910 사립학교 수 참고., 이는 전국에 분포한 총 2,082개 교 중에서 평남 417개 교, 평북 367개 교, 황해 189개 교, 함남 189개 교 다음으로 많은 수치로, 평북과 황해도 서북지방이 기독교 영향으로 종교학교가 많은 점을 감안하면 경기도에 설립된 사립학교가 수적으로 우세함을 알 수 있다(김상기, 1984, 「 한말 사립학교의 교육이념과 교육구국운동」 『청계사학 1』, 74~75쪽), 김정해, 위의 글, 134쪽, <표 2> 시기별 사립학교 설립 추세 참고.
다음 회에는 「제4절 여명기의 향토교육」마지막 순서로 여백을 활용한 각종 참고자료들을 소개드리겠습니다.
본책의 자료를 인용할 경우에는 출판정보를 참고하여 출처를 밝혀주십시오.